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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면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임금이 태어나신 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훈민정음 창제에 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특히 훈민정음은 세종임금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창제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집현전 학자들은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해서 대부분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기득권층인 사대부들은 이미 한문에 통달해 있었기에 굳이 새로운 글자의 필요성이 없었을 뿐더러 중국이 시비를 걸 가능성이 있기에 내놓고 창제할 상황이 아니었지요.
또 우리가 훈민정음 창제에 큰 힘을 보탰다고 알고 있는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이개 같은 학자들은 나이도 젊었고 당시 막 과거에 급제한 상황이어서 훈민정음 창제에 필요한 문자학, 음성학, 음운학 같은 학문이 깊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다만 그들은 창제 이후에 반포 과정에서 많은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훈민정음은 세종임금이 홀로 창제 했을까요? 아닙니다. 비밀을 지켜줄만한 왕자와 공주들이 창제 작업에 큰 역할을 한 것이지요.
그 가운데서 정의공주는 《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에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세종이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토착(사투리)을 다 끝내지 못하여서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다. 드디어 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 그렇게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을 세운 정의공주는 도봉산 연봉의 남쪽 작은 봉우리인 시루봉 기슭에 그 무덤이 있습니다. 무덤은 공주의 남편인 양효공 안맹담의 무덤과 함께 쌍분인데 유형문화재 제50호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으로 지정되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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