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레빗) 3284. 수천 년을 날아온 화살, 이를 만드는 궁시장

튼씩이 2016. 5. 10. 11:19

날마다 쓰는 한국문화 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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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9(2016). 5. 10



지난 2011년 개봉한 영화 “최종병기 활”을 보셨나요? 이 영화는 제48회 대종상 영화제(2011년) 남우주연상(박해일)을 비롯하여 제32회 청룡영화상(2011년) 남우주연상(박해일)과 남우조연상(류승룡) 등 수많은 상을 받은 영화입니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 겨레가 활을 얼마나 잘 쏘았는지, 무기로서 활이 얼마나 무섭고 강력한 병기였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사상 활 잘 쏘는 이들은 많았지요. 그 가운데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은 어렸을 적 파리를 쏘는 족족 맞혔고 비류국 송양왕과의 겨루기에서, 100보 밖에 걸어둔 반지를 맞혔다고 합니다. 또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화살 한 발에 까치 다섯 마리를 꿰었고, 두 마리 노루를 꿰뚫은 화살이 나무에 박혔는데 이를 뽑을 수가 없었다고도 하지요. 오죽했으면 중국민족이 우리 겨레를 ‘동쪽에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는 뜻인 동이족(東夷族)이라 했을까요?

우리나라에서는 중석기시대의 세석기류 중 화살촉이 출토되어 활이 이미 원시사회에서 널리 쓰인 사냥도구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 활과 화살을 만드는 기능과 기능을 가진 장인을 문화재청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弓矢匠)”으로 지정했습니다. 세분하면 활을 만드는 사람은 궁장(弓匠),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시장(矢匠)이지요. 보기엔 간단해 보여도, 수천 년을 날아온 화살 그 하나를 만드는 데 130번의 손길이 가야 한다는데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예능 보유자는 유영기, 김종국, 박호준 선생이며, 궁장은 권영학 선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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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악속풀이 262>

백영춘의 소리는 “물먹은 소리?”



지난주에는 정득만으로부터 백영춘이 재담소리와 인연을 맺게 되는 이야기를 하였다. 정득만은 3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이창배와 함께 활동하기 시작하여 50년대에는 <청구고전성악학원>의 소리선생으로 제자들을 양성했으며, 80년대 초반 벽파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경서도 소리의 중흥을 위해 함께 애쓴 명창이라는 이야기를 했고, 숨이 길고 청이 높아 사설지름시조, 긴잡가를 잘 불렀는데, 특히 조르는 목이 일품이었다는 점을 얘기했다.

그런 그에겐 또 다른 비장의 무기가 있었는데, 바로 1920년대 재담으로 유명했던 박춘재의 사랑방에 드나들며 익혀두었던 <장대장타령>과 같은 재담소리도 기억하고 있었다는 점, 그래서 백영춘에게 재담소리를 권했고 백영춘은 이를 받아드렸는데, 집중적으로 배웠다고 하는 부분은 앞부분인 ‘만포첨사’ 대목과 ‘이를테야’ 대목이었다는 점을 말했다.

또 재담소리의 음조직이나 표현법은 서울 경기지방의 토리(음조)로 불러왔다는 점, 맥이 끊긴 소리를 다시 재현하기 위해 재담과 관련된 옛 기록이나 고음반, 재담에 관한 증언, 원로 소리꾼들의 녹음작업 등을 통해 복원을 시도했고, 이를 1999년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공개적으로 올렸다는 점 등을 이야기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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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춘이 100여 년 전의 재담소리였던 <장대장타령>을 복원하고, 이를 재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기초자료가 되었던 것은 박춘재가 유성기에 남긴 음반 ‘장대장타령’이었다. 이와 함께 원로 실기인들이나 학자들의 증언이나 고증도 복원작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무대에 오른 공연을 통해서 관객들은 재담소리가 어떤 형태이고, <장대장타령>의 줄거리가 어떤 내용인가 하는 점도 알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주인공 격인 허봉사 역을 담당한 백영춘의 소리나 춤, 연기력에 감탄한 것이다.

또한 최영숙을 비롯한 제자들의 소리나 춤, 동작, 연기도 대단한 반응을 보였다. 이러한 재담소리 공연이 예상외의 반응을 보이자 백영춘은 더더욱 고민이 깊어졌다. 보다 더 완벽한 옛 재담소리의 재현을 위한 연구를 위한 고민인 것이다. 그의 주전공 분야가 선소리 산타령이나 민요 창의 무대공연이나 전승교육이었지만, 이제 이러한 분야는 뒷전이 되었다. 모든 공연을 재담소리 위주로 준비하는 것이었으며 그것도 경서도 소리극 형태로 제작하여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리극이란 무엇이고, 창극이란 말은 언제부터 생긴 말인가?

창극(唱劇)은 판소리를 기본으로 하는 소리극을 의미한다. 경서도창을 기본으로 하는 소리극은 <창극>이라 부르지 않고 <소리극>이라는 이름으로 통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소위 창극의 역사, 그러니까 종래의 판소리 음악을 극으로 꾸며 창극으로 선을 보이기 시작된 시기는 대략 1900년대 초기로 보고 있으나 이 시기는 아직 연출의 도입이라든가 하는 본격적인 연극양식을 갖춘 시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이 당시 판소리 이외에도 박춘재가 주도하는 재담소리나 서도소리꾼들의 의해 연희되던 배뱅이굿과 같은 서도의 창극조도 공연은 활발했으나 극과의 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창극의 활동이 비교적 활발하게 펼쳐지기 시작한 때는 1934년, <조선성악연구회>의 창립 전후이며, 그 후에는 여성 국극이 대단한 인기 속에 흥행을 주도하다가 1960년대 초, <국립국극단>이 설립되면서 활발해 졌다고 하겠다.

이에 견주면 경서도 소리극의 태동은 너무도 늦은 1990년대 말이다. 이춘희의 <남촌별곡>이나 <시집가는 날>과 같은 소설을 기반으로 한 창작 경서도 소리극들을 시작으로 임정란, 김혜란, 유창, 유지숙, 박준영, 김경배 등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경서도 소리꾼들의 의해 소리극들이 제작, 공연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세는 너무도 미미한 수준이었다. 2000년 전후에는 이은관의 <배뱅이굿>이나 백영춘의 <장대장타령> 등 종래의 1인 창극조를 극화시킨 소리극들이 가세하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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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춘은 재담소리를 기본으로 하는 소리극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발탈>을 배우기도 하였다. 발탈이 재담과 어우러진 연희극이기 때문이다. 박춘재-이동안으로 이어지는 발탈은 박해일에게 이어졌고 이것을 백영춘이 이수한 것이다.

백영춘의 재담사랑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박춘재의 특장인 <장님타령>이나 <장대장타령>의 올바른 전승의 필요성을 느껴 《서울재담소리보존회》를 만들어 본격적인 활동을 기획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최영숙과 함께 운영해 나가던 《경서도 창악회》내에 ‘광무대’라는 소공연장을 개장하고 여기에서 정기적으로 일반인을 상대로 재담소리의 무료 강습회와 실제의 공연을 지속해 온 것이다. 전국에서 재담소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의 소리나 연기, 강의를 들어본 사람들은 재담소리에 관한 그의 열정에 모두 놀래고 만다.

그러나 그에게 어두운 빛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서울의 재담소리를 되찾고 공개적으로 재현작업을 통해 공연을 준비하는 사이 그는 점차 건강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한 소문이 퍼져 있었다.

백영춘의 소리는 “물먹은 소리”, “소리에 물기가 묻어난다”는 웃지 못 할 얘기가 나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갈증을 많이 느끼는 병, 큰 주전자 한 통을 입에 대고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해도 시원해지지 않는 병이었다. 병원을 찾았지만, 이미 회복이 불가하다는 안타까운 결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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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한 범 / 단국대 명예교수, 한국전통음악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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