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우리나라 최초 대중연예집단 안성 ‘남사당패’

튼씩이 2015. 11. 6. 14:35

날마다 쓰는 한국문화 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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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8(2015). 10. 27.



안성맞춤의 고장 안성은 안성유기와 남사당패의 바우덕이(1848~1870)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어린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남사당패에 맡겨진 바우덕이는 타고난 재주꾼인데다가 끈질긴 노력을 보태 남사당패 여섯 마당을 모두 익혔으며 그 가운데 줄타기는 당대 으뜸이었다고 합니다. 어린 소녀 바우덕이가 줄 위에 서면 구경 온 일꾼들이 정신을 빼앗겨 빈 지게를 지고 다닐 정도였다고 하지요. 바우덕이가 속한 남사당은 조선 후기 장터와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곡예, 춤, 노래를 공연했던 집단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연예집단입니다.

남사당의 발생 시기는 조선 숙종(1661~1720) 때로 남사당패가 시작된 곳이자 전국 남사당패의 중심이 되었던 곳은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의 불당골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남사당은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40~50여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단체의 우두머리를 꼭두쇠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꼭두쇠를 중심으로 공연 내용을 정하여 기예를 연마하였고 전국의 장터와 마을을 다니면서 풍물놀이, 줄타기, 탈놀음, 창(노래), 인형극, 곡예(서커스)등을 공연하였습니다. 특히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고 있을 때 ‘바우덕이’의 안성 남사당패가 신명나는 공연으로 노역자들을 기쁘게 하여 경복궁 중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고 해서 노비보다 천한 남사당패에게 흥선대원군은 당상관 정3품의 벼슬에 해당하는 옥관자를 수여했다고 하지요.

천하의 재주꾼 바우덕이는 스물셋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지만 바우덕이의 남사당 후예들은 오늘날과 같은 당당한 남사당패로 그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안성에서는 2001년도부터 해마다 조선 최초의 여자 꼭두쇠 바우덕이를 기리고 남사당 문화를 세계적인 예술 문화로 전승 발전시키고자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축제’를 열고 있지요. 올해는 10월 7일부터 11일까지 다채로운 행사의 바우덕이 잔치가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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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악속풀이 234>

조선권번 잡가선생이며 <금강산타령> 작사 작곡한 최정식



지난주에는 박춘재 명창의 30살 이후 활동상황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였다. 그는 광복 이후 지방 순회공연을 떠나있던 도중에 전쟁을 만나 세상을 떴는데 그의 나이 67살 이었으며, 전쟁의 와중이어서 그의 죽음은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야기, 김은신이 쓴 박춘재의 일대기 《조선일류가객-박춘재》라는 이름의 소설은 불행한 시대에 태어난 한 명창을 밝게 널리 알리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는 점을 얘기했다.

또 이춘희 명창은 재담소리의 최고봉이 바로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명창 박춘재 선생인데, 그의 이력이 지금까지 국악계에 잘 알려지지 못했고 관련 자료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박춘재명창 기념사업회>와 <기념관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아울러 이러한 평전이 발행되어 기쁨을 감출 수 없다는 소감을 피력했다는 점, 또한 원로 희극인 송해 씨도 “재치와 풍자, 웃음과 재미로 엮어져 전해지는 재담은 소리와 함께 한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우리의 정신문화라는 점을 강조하며 우리에게는 박춘재 명인이 있어 자존과 긍지 그리고 희망이 있다고 했다.

이어서 배연형과 손태도 역시 궁중과 시정을 넘나들고 경서도를 메주 밟듯 누비고 다닌 자유인이었다는 이야기, 그는 진실로 대표적 경기명창이었고, 우리나라의 대표적 명인 명창이었으나 우리가 그를 위해 한 것은 없었던 차에 이 소설이 우리의 그러한 무지와 무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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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일제의 찬탈이 극도에 달해 있을 때, 민족혼을 지키기 위해 비교적 활발하게 움직였던<조선가무연구회(朝鮮歌舞硏究會)>란 단체가 있었다. 이 연구회는 1930년 중반에 최경식, 박춘재 등의 경기와 서도 음악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로 이름 그대로 경기지방이나 서도 지방의 가무(歌舞)를 연구하기 위해 만든 단체였던 것이다.

이창배의 《가창대계》를 참고해 보면 당시에 활동했던 회원들의 명단이 소개되어 있는데, 제일먼저 원각사 시절 광무대로 이름을 날렸던 맹인재담이나 장고로 유명했던 박춘재 명인부터 꼽고 있다. 그리고 박춘재와 더불어 <개넋두리>라든가 <장대장타령>으로 유명했던 이순일도 들어있고, 학자였던 맹호준의 이름도 보인다.

양주 산대놀이의 선구자였던 정한규와 이건식이 참여했는가 하면, 목청 좋기로 이름이 나 있던 봉성학의 이름도 들어 있고 12잡가의 대 명창으로 이창배의 스승인 원범산의 이름도 보이고 있다. 또한 선소리 산타령을 잘 불렀던 명창들도 소개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과천의 모갑(우두머리)이었던 소완준을 비롯하여 왕십리패의 이명길이나 탁복만, 이명산, 김태봉과 같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고전무용의 이칠성이나 잡가와 민요로 일세를 풍미한 김태운, 그리고 시조와 가사, 경서도 잡가와 산타령을 함께 잘 불렀던 엄태영도 들어있고, 서대문밖의 박윤병이나, 종로의 조원식, 유태환도 동 연구회에서 활동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을 끄는 사람은 조선권번의 잡가선생으로 <금강산타령>이나 <풍등가>를 작사 작곡한 최정식이다.

<금강산타령>은 지금도 경기민요를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익혀야 하는 필수의 악곡이고 경서도 경창대회에는 장기타령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선곡하는 곡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의 삼각산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지리산이 있고, 서쪽에는 묘향산이 있으며, 북쪽에는 백두산이 있어 이를 절경으로 꼽고 있는데,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금강산의 절경을 노래하고 있어서 금강산타령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모두 7절의 구성인데, 1~6절 까지는 6박의 도드리 장단으로 부르고, 마지막 7절은 노랫가락으로 맺는 형식이다. 그 1절과 7절의 노래말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천하명산 어드메뇨, 천하명산 구경갈제, 동해끼고
솟은 산이 일만이천 봉우리가 구름같이 벌렸으니
금강산이 분명쿠나.
7. 금강아 말물어보자. 고금사(古今事)를 다 일러라.
영웅호걸 재자가인(才子佳人)이 몇몇이나 왔다갔노.
물음에 대답은 없어도 너는 응당 알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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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한 범 / 단국대 명예교수, 한국전통음악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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