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율곡이 “백세의 스승”이라 칭송한 김시습

튼씩이 2015. 11. 10. 09:22

날마다 쓰는 한국문화 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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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8(2015). 11. 10.



“踏破千山與滿山(답파천산여만산) : 천산과 만산을 돌아다니고
洞門牢鎖白雲關(동문뇌쇄백운관) : 골짝 문을 굳게 닫고 흰구름으로 잠갔다
萬松嶺上間屋(만송령상간옥) : 많은 소나무로 고개 위에 한 칸 집 지으니
僧與白雲相對閑(승여백운상대한) : 스님과 흰 구름 서로 보며 한가하다“

위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쓴 한시(漢詩) “산거집구(山居集句)” 곧 “산에 살며”의 하나입니다. 원래 “집구(集句)”란 이 사람 저 사람의 시에서 한 구절씩 따와 새로운 시를 짓되 운자도 맞아야 하기 때문에 완전한 창작 이상의 예술혼이 담긴 작품이지요. 이 작품에는 떠돌이 삶을 산 자신의 모습과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 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골짝 문을 굳게 닫고 흰구름으로 잠갔다.”라든가 “스님과 흰구름 서로 보며 한가하다.”라고 한 시구는 매월당이 뛰어난 시심을 지닌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작가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세조에게 밀려난 단종에 대한 신의를 끝까지 지키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자연에 은거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지요. 특히 그는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임을 당한 사육신들의 주검을 거두어 지금의 노량진에 묻은 사람이라는 게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슬이 퍼런 세조의 위세에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김시습이 주검 하나하나 바랑에 담아 한강 건너 노량진에 묻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배운 것을 철저히 실천에 옮기는 지식인이었으며, 그 결과 율곡 이이로부터 “백세의 스승”이라는 칭송을 들었다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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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악속풀이 236>

방물가로 유명했던 유개동 명창



지난주에는 최정식이 작사 작곡한 <금강산 타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 노래는 처음에는 낮게 조용히 시작해서 점차 상행선율을 그려 나가다가 <일만이천> 대모에서는 최고조에 달하고 다시 하행하는 형식의 노래라는 점, 장단은 도드리장단의 6박+6박, 도합 12박이 짝을 이루는데, 12박 중에는 가사를 반드시 붙이는 박과 붙이지 않는 박이 거의 규칙적으로 나오고 있다는 점을 얘기했다.

또 금강산에는 무려 40여 개의 절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장안사(長安寺)와 표훈사(表訓寺), 유점사(楡岾寺), 신계사(神溪寺) 등이 유명하며 <유점사>를 금강 제일의 사찰로 꼽고 있다는 점, 그 이유는 53불(佛)과 인목대비의 친필, 서산대사(西山大師)의 높은 제자 사명당(四溟堂)이 머물며 가르침을 주던 곳이라는 점도 덧붙였다.

한편, <풍등가(登歌)>는 농사 열심히 지어 나라를 일으키자는 취지로 1900년대 초에 만들어진 노래인데, 노래말에 논농사에 뿌리는 벼 종류의 이름, 밭농사의 곡식이름이 나오며, 열심히 농사를 지어 부국을 노래하고 있어 놀자판 가사와는 달리, 건실한 내용이라는 점, 처음 시작부분은 “국태민안 시화연풍 연년이 돌아든다. 황무지 빈터를 개간하여 농업보국에 증산하세”로 시작하는데, 가락은 경기민요의 창부타령조로 부르다가 끝 부분에서 노래가락조로 맺는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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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최경식이나 박춘재 등이 중심이었던 가무연구회를 소개하면서 묵계월의 스승인 최정식 명창이 작사 작곡한 <금강산타령>이나 <풍등가>는 지금도 소리꾼들이 즐겨 부르고 있다. 가무연구회의 또 다른 회원으로는 한성권번에서 잡가 선생을 지낸 유개동도 포함된다.

유개동은 1960년대 말, 선소리 산타령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김태봉, 이창배, 정득만, 김태순와 함께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던 5인중의 한 사람이다. 서울 영등포 출생으로 어려서부터 한문을 공부하여 그 실력이 뛰어 났었는데, 어느 날 어느 명창이 부르는 긴잡가 소리를 듣고 그때부터 글공부보다는 노래에 취미를 붙여 소리길로 들어선 사람이다.

버젓이 선생을 모셔 정식으로 경기소리를 부르고 배운 것이 아니라 동네의 소리마당인 공청에서 여러 사람들이 노래하는 것을 열심히 듣고 익히다가 나중에 본격적으로 소리공부를 해서 유명한 명창이 되었다. 특히 경기12잡가와 산타령은 누구보다도 능숙하게 잘 불렀다. 그는 또한 12잡가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록할 정도로 가사의 암기며 사설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였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유개동은 1930년대 이후부터 한성권번에서 경서도창과 민요선생으로 활약을 해 오다가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권번이 폐쇄됨에 따라 그 일을 접었으며 당시에도, 그리고 광복 뒤에도 정득만과 더불어 경기산타령, 서도 산타령, 휘몰이 등을 취입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서도창으로 수심가를 두드러지게 잘 불렀으며 그 지역 명창 못지않게 독특한 서도의 목을 잘 묘사하였다. 1960년대 말에 산타령의 예능보유자가 되었으나 노쇠한 탓에 공연활동이나 후계자 양성, 등 전승사업은 활발치 못하였으며 1975년 1월에 세상을 떴다. 유개동은 특히 서울 경기의 12잡가 중, 방물가(房物歌)를 잘 불렀던 명창으로 유명했다. 방물가는 오직 그 만이 잘 알고 잘 불렀기 때문에 이창배도 그에게 배웠고, 그 배운 노래를 많은 후배에게 가르쳐 전승시켰다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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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물이란 여자들의 소용인 패물이라든가 잡화를 말하는데, 노래의 가사는 이와 같은 방물을 열거하고 있으나 속뜻은 남녀의 사랑이 주제가 되고 있다. 예전에는 이와 같은 잡화를 시장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방물장수가 이집 저집을 드나들면서 팔았는데 바깥세상을 내외하고 들어앉아 있는 여인들에게 있어 방물장수가 보여주는 갖가지 잡화는 여인의 호기심을 한껏 충족시켜 주었을 것이라 생각이 된다.

현재는 서울 경기지방의 긴소리를 12곡으로 정해 놓고 12잡가로 통칭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8잡가와 기타의 잡잡가로 분류되기도 했었다. 이 방물가는 사설의 내용이나 가락의 전개 등 8잡가에 포함되지 못하였던 노래였다.

유개동을 포함하여 여러 사범급 명창들은 기생을 양성하던 권번(券番)을 중심으로 활동을 해 왔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이른바 기생조합이란 이름으로 생겨났는데, 이것이 한성 권번의 전신인 광교조합이다. 이때부터 일패니 이패니 삼패니 하는 구별이 없어지고 다 기생으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이 시대의 기생은 남편이 있는 유부기(有夫妓)와 일정한 남편이 없는 무부기로 구분이 되었다. 그런데 남편(기생서방)이 있는 유부기가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 까닭은 기생서방이 예의범절, 손님접대, 언어, 행동, 가무(歌舞) 일체를 손색없이 가르쳐서 기생으로서의 완전한 자격을 구비시켜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성권번은 유부기들로 구성된 조합으로서 권번에서는 가곡, 가사, 시조에 경기잡가, 서도잡가, 민요, 정재무, 묵화 등 다채로운 과목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의 가곡 선생은 장계춘, 가사와 시조선생은 조영호, 경기잡가와 서도잡가의 선생이 바로 유개동이었던 것이다. 한성 권번 시절에 그가 키운 제자로 유명했던 명창들은 장채선을 비롯하여 이비봉, 최명월, 주학선, 한난홍 등이나 이들은 명창의 길을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도에 접고 가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 후, 가곡 잘 하는 하규일이 당시의 세력가 송병준의 힘을 빌려 무부기들을 모집하여 다동에다가 조선권번을 세우고 학감(學監)이 되어 가곡, 가사, 시조를 전담하였고, 기타 민요나 잡가는 앞에서 이야기 한 최정식이 가르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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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한 범 / 단국대 명예교수, 한국전통음악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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