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민족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000만 동포야 죽음을 결단코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이는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 장례일)을 기해 만세시위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의 한 격문입니다. <6·10만세운동>은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이 연합하여 만세시위를 계획하였지만, 사전에 일제 경찰에 들켜 무산되었습니다.
▲ 서울 종로3가 단성사 앞에 있는 <6·10만세운동> 선창터
하지만, 확산해온 학생운동 조직은 준비과정에서 일경에 들키지 않았지요, 먼저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중심의 사직동계가 주도했는데 화요회계와 통동계가 연합하여 태극기 300장과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 30장을 만들었으며, 명함인쇄기 한 대를 구해 초안한 격문 1만여 매를 인쇄했습니다. 6월 10일 순종의 장례 행렬은 창덕궁에서 발인을 마친 뒤 종로ㆍ동대문을 거쳐 금곡 유릉(裕陵)으로 가는 장례 행렬의 연도에는 30만 명의 군중이 몰려들었지요. 이때 학생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 1,000장과 태극기 30여 장을 뿌렸습니다.
일제는 군대 1만 명을 서울에 긴급 투입했으며, 인도에 총검으로 무장한 군인과 기마 경찰, 헌병을 집중 배치했지만, 학생들에게 허를 찔렸지요. 이에 군중들도 학생들과 합세하여 제2의 3·1운동과 같은 상황이 펼쳐졌으나, 동원된 일본군에게 저지당하고 말았는데 이때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수는 서울에서 210여 명이었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후 이 사실이 지방에까지 알려지면서 온 나라에 파급되었는데 <6·10만세운동>은 침체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안겨주었음은 물론 3·1만세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 사이 다리 구실이 되어 꺼지지 않는 민족 독립운동사의 하나의 큰 횃불이 되었습니다.
▲ <6·10만세운동> 주도 인물들의 제1회 공판 기사(동아일보 1926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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