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레빗 4466호) 81년 전 오늘은 창씨개명 법령 공포한 날

튼씩이 2020. 11. 10. 07:58

지금으로부터 81년 전인 1939년 오늘(11월 10일)은 일제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위해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 공포한 날입니다. 창씨개명은 일제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의 하나인데 강제로 조선 사람의 성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 창씨개명을 접수하기 시작한 날은 다음 해인 1940년 2월 11일부터였는데 이틀 만에 87건이 접수되었습니다. 특히 그날 아침 관리들이 문을 여는 시각을 기다려 가장 먼저 달려가 ‘향산광랑(香山光郞)’이란 이름으로 등록을 마친 사람은 조선 으뜸 작가라는 이광수였습니다.

 

 

 

▲ 1939년 12월 12일 치 경성일보에 실린 이광수의 창씨개명 권고 칼럼

 

 

그는 창씨개명한 까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香山光浪)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게 살기 위해 창씨개명 한다고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일자무식이어서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던 황해도 옹진의 조선 무당 김기백은 창씨개명을 단호히 거부하며, 작두를 타면서도 피맺힌 절규로 일본을 비난하는 공수를 내렸습니다. 그는 결국 일제 경찰에 끌려간 뒤 소식이 끊어졌지요. 조선 으뜸 지식인임을 뽐내던 이광수는 가장 먼저 뛰어가 창씨개명을 했고, 일자무식 김기백은 일제 경찰로부터 온갖 고문을 당하고 죽으면서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줍니다.

 

 

 

▲ 큰무당 우옥주 신당에 모셔졌던 김기백 나랏만신, 작두를 타면서도 일본을 저주하는 공수를 내렸다.(양종승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