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의 입양, 나라에서 허락했다
조선 전기만 해도 우리나라는 고려시대 가족제도를 이어받아 아들과 딸이 똑같이 재산을 나누는 ‘균분상속제’였으며, 제사도 아들은 물론 딸도 함께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족제도는 임진왜란 이후 급격하게 변하여 균분상속제가 무너지고 부계 중심의 가족제도로 굳어집니다. 그와 함께 입양 사례가 빠르게 늘어나는데, 이는 장자상속이 보편화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장자상속과 그에 따른 입양사례를 가장 실감나게 엿볼 수 있는 것이 보물 제482-5호 <고산 양자 예조입안> 문서입니다. 이 문서는 선조 35년(1602년) 6월 초이틀에 윤유심尹唯深의 둘째아들인 선도를 윤유심의 형인 유기唯幾에게 양자로 들일 것을 예조(禮曹)에서 허가한 결재문서지요. 이를 보면 양쪽 집안의 동의서를 확인하고 『경국대전』 「입후(立後)」의 규정에 따라 나라에 이를 허가하여 달라는 청원서를 냈는데, 이를 좌랑, 정랑, 참의, 참판, 판서가 수결(오늘날의 서명)하여 허락한 것입니다.
이렇게 양자를 들이는 일에 나라가 문서로 허락한 것을 보면 입양이 일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지요. 동시에 이 문서는 장자의 혈통을 증명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직계혈통에 대한 시비나 재산권 상속에 중요한 증명이 되는 것이지요. 해남 윤씨 가는 다른 가문에 견주어 입양을 통해 대를 이은 경우가 많은데 이는 고산의 아버지인 윤유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어초은 윤효정 이래 12대 윤광호에 이르기까지만 종손으로 4명이 입양되어 종통을 이었지요. 따라서 입양은 해남 윤씨 가의 특별한 가풍이 되었으며, 어쩌면 그 덕에 그 많은 재산이 흩어지지 않고 이어갈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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