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임금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송언신
200여 년이 지난 뒤에 그 일을 아뢰는 자가 있기에 가져다 보니 그 문장이 마치 운한(雲漢)이 밝은 빛을 내며 회전해서 찬란하게 문장을 이루어 상서로운 빛이 나와 하늘을 찌르는 것 같았다. (……) 듣건대 그의 집이 옛부터 한강 남쪽에 있는데 매우 가난하여 이 첩을 정성들여 걸어둘 곳이 없다 하므로 그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집(閣)을 지어주어 봉안(奉安)하게 하였고, 그에게 영양(榮襄)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이어 그 자손을 찾아서 그 고을에서 먹여주도록 하였다.
『정조실록』 13년(1789년) 6월 5일 기록입니다. 송언신(宋彦愼, 1542∼1612년)은 선조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등을 지낸 인물입니다. 언관으로서 서인을 공격하는 데에 앞장서는 바람에 여러 번 삭탈관직당하는 등 파란만장한 정치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러나 선조는 송언신을 몹시 신임하여 그를 파직하라는 상소문도 여러 번 반려하면서 적극 두둔했고, 어찰을 내리는 등 각별한 사랑을 쏟습니다. 한번은 송언신이 함경감사 시절 어머니의 병구완을 위해 사직을 요청하지만 선조는 “본도(함경도)는 지금 적이 올 것이라는 소식이 있어 조석으로 염려가 된다. 이런 때 방백을 바꿀 수 없으니 경은 우선 참고 직무를 살피라”라며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선조실록』 32년(1599년) 2월 25일 세 번째 기록].
그 송언신의 초상이 경기도박물관에 남아 있어 눈에 띕니다. 송언신이 오사모에 단령을 입고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좌상으로 가슴에는 모란과 운안(雲雁, 구름과 기러기) 무늬가 있는 흉배가 달려 있으며 삽금대(鈒金帶)를 두르고 있어 정2품의 대사헌과 이조판서를 지낸 송언신의 당시 품계를 잘 나타내줍니다. 단령의 외곽선은 부드럽게 처리한 데 견주어 손을 잡은 부위의 주름이나 윤곽은 모나게 처리되어 있고, 옷 주름은 간단히 균일한 선으로 처리하는 등 매우 정교한 그림입니다. 이 영정은 송언신이 죽기 1년 전인 1611년 작품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당시 문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첩 보통 조선시대 관청의 책임자가 관속에게 내리는 문서를 말하지만, 여기서는 200년 전 선조가 송언신에게 내린 어찰을 일컫는다.
삽금대 조선시대 정2품의 벼슬아치가 관복에 매던 띠.
'사진이 있는 이야기 > 아름다운 우리문화 산책(김영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를 쓴 백운화상 (0) | 2021.12.31 |
---|---|
청백리 인정받자 사양한 조사수 (0) | 2021.12.30 |
임금의 꿈에 용으로 비친 장수, 정기룡 (0) | 2021.12.28 |
이조판서 오윤겸,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울다 (0) | 2021.12.27 |
정치적 식견이 큰 조선의 명재상, 황희 (0) | 2021.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