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조선 최초의 고아원은 언제 생겼을까?

튼씩이 2015. 11. 19. 20:25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다른 얼레빗 모두 보기

단기 4348(2015). 11. 12.



“이 해에 전라도가 조금 풍년이 들었으므로 여러 도의 주린 백성들이 모두 가서 얻어먹는데, 그 어린아이를 먹이지 못하여 혹은 길가에 버리고, 혹은 나무에 매어 놓고 가고, 혹은 남의 집에서 하룻밤 자기를 청하고서 버리고 가니, 남녀의 어린 아이가 모두 32명이나 되었다. 임금이 호조에 명하여 그 도에 공문을 보내어 급히 구휼을 하도록 하였다.”

이는 《세종실록》 19년(1437) 1월 13일 치 기록으로 고아가 된 아이를 급히 구휼하게 했다는 얘기입니다. 세종 때 한양은 날로 번창하고 인구도 많이 늘어났는데 이에 따라 아이를 잃어버리거나 버리는 경우도 많아졌지요. 그래서 처음엔 이 아이들을 빈민구제기관인 “제생원(濟生院)” 노비들에게 보살피도록 합니다. 그러나 노비들도 가난하여 제 자식도 돌보지 못하는 처지라 이 고아들을 제대로 보살필 수가 없었지요.

이에 제생원의 건의에 따라 1435년 6월 22일 조선 최초의 고아원이 한양 제생원 옆에 세워지게 됩니다. 이 최초의 세 칸짜리 고아원은 남종과 여종 한 명씩을 두어 아이들을 보살피게 했으며, 백성들 가운데 자원봉사자도 뽑아 돌보도록 했습니다. 또 고아들에게는 나라에서 옷과 이불을 주고 혹시 배고픔에 시달리지나 않는지 상급 기관에서 감찰하도록 했지요.

옛 얼레빗 (2011-11-10)


2197. 94명 중 여성은 겨우 2명이 지원한 백일장

.

오늘은 대학에 들어갈 학생들이 수능시험을 치르는 날입니다. 예전에는 시험날만 되면 으레 한파로 고생이었으나 시험 날짜를 11월로 옮기고 나니 날씨 걱정은 한시름 놓입니다. 온 나라가 출근시간까지 늦추며 수학능력고사를 치르는 요즈음과 달리 조선시대엔 국가적인 시험으로 과거가 있었지요.

과거 시험 말고 많은 사람이 모여서 글솜씨를 겨루는 백일장(白日場)도 있었는데 당시에 유생(儒生)들을 모아 시제(試題)를 내걸고, 즉석에서 시문을 짓게 하여 장원(壯元)을 뽑아 연회를 베풀고 상을 주었습니다. 벼슬길과는 관계가 없는 백일장은 과거(科擧)낙방생과 과거지망생의 명예욕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기도 했지요. 조선 후기에는 일자무식꾼까지도 참가하여 남의 글을 표절하기도 하고, 시험지 심사에 기생까지도 관여하여 엉터리로 등급을 정하거나 수령을 욕하는 글을 썼다가 포박되는 따위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백일장은 지난 50~60년대만 해도 성행하였지요. 1959년 10월 31일 자 동아일보에는 “異彩! 두 女流도, 과거 방불ㆍ백일장대회”라는 기사가 눈에 뜨입니다. 기사에 보면 82살의 노인부터 17살 청소년까지 참가했는데 두 여성이 참가하여 한층 이채로웠다고 쓰여 있습니다. 모두 94명이 참가한 대회에 여성이 겨우 두 명이었음을 보면 이때만 해도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활발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이지요. 당시 반공이데올로기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이어서 시제를 “반공”으로 내걸기도 하였습니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김영조
koya.egreennews.com
사울시 종로구 새문안5가길 3-1. 영진빌딩 703호
pine996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