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황(黃) 부자 전설의 아름다운 연못 태백 황지(黃池)

튼씩이 2015. 11. 19. 20:26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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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8(2015). 11. 13.



“어느 날 황(黃) 씨 성을 가진 부자가 마구간을 치우고 있었는데 태백산 스님이 와서 시주를 하라고 했다. 황 부자는 곡식 대신 쇠똥을 던져주었다. 이것을 본 며느리가 민망하게 여겨 시아버지 모르게 쌀 한 되를 시주하고 대신 죄송하다고 했다. 그러자 스님이 며느리에게 “이 집은 곧 망할 것이니 처자는 나를 따라 오거라.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하였다. 며느리가 이에 스님을 따라서 가다가 구사리(九士里) 산꼭대기에 이르자 벼락 치는 소리가 나고 천지가 흔들렸다. 놀란 며느리가 뒤를 돌아보니 황 부자가 살던 집이 못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뒤를 돌아본 며느리가 아기를 업은 채 그 자리에서 돌이 되고 말았다."

이는 태백산 자락에 있는 연못 황지(黃池)에 서린 전설입니다. 이 황지는 남한에서 제일 큰 강인 낙동강의 발원지 매봉산(梅峰山) 천의봉(天衣峯) 너덜샘에서 흘러내린 물이 만든 연못이지요. 황지는 상지(上池)ㆍ중지(中池)ㆍ하지(下池) 등 3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둘레는 각각 100m, 50m, 30m로 한국의 명수(名水) 100선에 드는 곳입니다. 특히, 상지 남쪽에는 깊이를 잴 수 없는 깊은 수굴(水窟)이 있어 가뭄에도 하루 약 5,000톤의 아주 맑은 물이 솟아나고 있어 1989년 광동댐이 건설되기 전까지 이 지역의 상수도원으로 쓰였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낙동강의 근원지로서 관아에서 제전을 두어 가뭄 때는 기우제를 올렸다.”고 했으며 그밖에 《택리지》, 《척주지(陟州誌)》, 《대동지지(大東地志)》 따위의 여러 문헌에 나옵니다. 원래의 못은 지금의 두 배쯤 되었고 주변에는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높고 낮은 건물들에 둘러싸인 작은 못으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서 가까운 곳에는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발 855m) 한 “추전역”이 있어 함께 둘러 볼만합니다.

옛 얼레빗 (2011-11-16)


2200. 선비들의 벗 벼루와 문예부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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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장인이 오랫동안 공들여 / 귀신의 솜씨인 양 조각했구나 / 대나무 곁에 매화는 피려 하고 / 구름 찌르며 학은 함께 난다 / 맑은 물결은 잔잔하게 자고 / 푸른 산은 가까운데도 희미해라 / 묵객들이 어루만진 지 오래이니 / 몇 번이나 붓 휘둘러 시를 지었을꼬” 이 시는 조선 중기 선비 이응희 (李應禧, 1579~1651)가 지은 “연각매죽운학산수(硯刻梅竹雲鶴山水)”라는 시로 벼루에 매화ㆍ대나무ㆍ구름ㆍ학ㆍ산ㆍ물을 새겨 놓았다는 내용입니다.

이응희는 경기도 군포 수리산(修理山) 아래에서 숨어 살면서 학문에 전념했던 사람이지요. 조선시대 선비들이 거처하던 사랑방에는 서안(책을 얹는 재래식 책상), 고비(편지 따위를 꽂아 두는 기구), 책장, 사방탁자, 문갑과 함께 붓, 벼루, 먹, 종이, 문진, 연적, 연갑(硯匣, 벼룻집), 필가(붓을 걸어 놓는 기구), 필세(붓을 빠는 그릇), 필통, 향꽂이, 차도구 따위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벼루는 ‘석우(石友)’라고 해서 선비들이 중요시 했는데 선물로도 많이 주고받았습니다. 한국 벼루는 조선 세종부터 성종 시기의 문예 부흥기에 많은 발전이 있었는데 특히 숙종부터 영조, 정조에 이르는 풍요로운 안정기에 매우 다양한 무늬와 형식의 고급벼루가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평생 벼루 열 개를 달아 없앤 추사 김정희 역시 벼루와 각별한 정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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