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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에 전라도가 조금 풍년이 들었으므로 여러 도의 주린 백성들이 모두 가서 얻어먹는데, 그 어린아이를 먹이지 못하여 혹은 길가에 버리고, 혹은 나무에 매어 놓고 가고, 혹은 남의 집에서 하룻밤 자기를 청하고서 버리고 가니, 남녀의 어린 아이가 모두 32명이나 되었다. 임금이 호조에 명하여 그 도에 공문을 보내어 급히 구휼을 하도록 하였다.”
이는 《세종실록》 19년(1437) 1월 13일 치 기록으로 고아가 된 아이를 급히 구휼하게 했다는 얘기입니다. 세종 때 한양은 날로 번창하고 인구도 많이 늘어났는데 이에 따라 아이를 잃어버리거나 버리는 경우도 많아졌지요. 그래서 처음엔 이 아이들을 빈민구제기관인 “제생원(濟生院)” 노비들에게 보살피도록 합니다. 그러나 노비들도 가난하여 제 자식도 돌보지 못하는 처지라 이 고아들을 제대로 보살필 수가 없었지요.
이에 제생원의 건의에 따라 1435년 6월 22일 조선 최초의 고아원이 한양 제생원 옆에 세워지게 됩니다. 이 최초의 세 칸짜리 고아원은 남종과 여종 한 명씩을 두어 아이들을 보살피게 했으며, 백성들 가운데 자원봉사자도 뽑아 돌보도록 했습니다. 또 고아들에게는 나라에서 옷과 이불을 주고 혹시 배고픔에 시달리지나 않는지 상급 기관에서 감찰하도록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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