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레빗) 3405. 은둔한 최치원의 아픈 가슴, “비오는 가을밤에”

튼씩이 2016. 10. 14. 09:32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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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9(2016). 10. 13.



秋風惟苦吟 가을바람 쓸쓸하고 애처로운데
擧世少知音 세상에는 알아줄 이 별반 없구나
窓外三更雨 창밖에 밤은 깊고 비는 오는데
燈前萬里心 등잔불만 고요히 비추어 주네

위는 신라시대 뛰어난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의 한시 “비오는 가을밤에[秋夜雨中]”입니다. 6두품 집안 출신이었던 최치원은 신라에서는 아무리 뛰어나도 6두품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868년 열두 살의 나이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납니다. 당나라에 간 최치원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는 기록을 남길 만큼 열심히 공부했지요. 드디어 최치원은 빈공과 장원으로 합격했습니다.

이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써서 황소를 격퇴해 황제로부터 정5품 이상에게 하사하는 붉은 주머니 자금어대를 받음으로써 그의 능력을 인정받기에 이릅니다. 그 뒤 17년 동안의 당나라 생활을 접고 고국 신라로 돌아오지요. 그리고 신라 개혁을 위해 몸부림치다가 중앙 귀족들 때문에 성공하지 못하고 운둔을 하게 됩니다. 최치원은 이후 경주의 남산, 강주, 합천의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동래의 해운대 등에 발자취를 남기고 신선이 되었다고 하지요. 가을바람 쓸쓸하게 불고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은둔한 최치원이 곱씹었을 아픈 가슴이 전해오는 듯합니다.

옛 얼레빗 (2012-10-16)



2396. 형제의 목숨을 건진 다리 “종침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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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뒤편 종로구 내자동 71 부근에는 종교교회가 있습니다. 종교교회는 예전 그 앞에 “종침교(琮沈橋)”라는 다리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하지요. “종침교”의 이름은 조선 성종(1457~1494) 임금 때 재상인 허종(許琮)과 동생인 허침(許沈) 형제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입니다.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성종은 조선 10대 임금이었던 연산군(1476~1506)의 생모 윤씨의 폐위를 논의하기 위한 어전회의를 소집했지요. 이 때 두 형제는 어전회의에 가기 전 누님에게 가 그 사실을 말하고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누님은 윤 씨를 폐위한 뒤 연산군이 임금이 되면 화가 미칠 것이라며, 다리에서 낙마했다는 핑계를 대고 어전회의 참석하지 말라고 했지요.

이후 누님의 예상대로 연산군은 임금이 되었고, 연산군의 생모 윤 씨 폐위를 위한 어전회의에 참석했던 대신들은 모두 화를 면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를 피했던 두 형제는 죽음을 모면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형제가 낙마한 다리 이름을“종침교(琮沈橋)”라 했고, 형의 이름만 붙여“종교(琮橋)”라 부르기도 했다지요. 누님의 슬기로움이 두 동생들은 살린 “종침교(琮沈橋)”는 이제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김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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