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한글문화연대 1004

보로, 보루, 보시

일본말 ‘보로(ぼろ)’는 ‘걸레’나 ‘넝마’, ‘누더기’ 따위를 이른다. 그래서 이 말은 일본에서 본디의 뜻 외에 ‘허술한 데, 결점’의 의미로도 쓰인다. 그래서일까, 이 말이 우리말에 들어와 ‘보로터지다’ 또는 ‘뽀록나다’로 모습이 바뀐 채 쓰이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가 하면, 당구 용어 가운데 요행수를 일컫는 ‘뽀록’이 있다. 일터에서 우연하게 성과를 냈을 경우에도 ‘뽀록’이라고 한다. 모두 영어 ‘fluke’의 일본식 발음 ‘후루꾸(フルク)’가 ‘뽀록’으로 변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일본말 잔재임이 분명하다. 국립국어원은 이미 이 말을 ‘드러나다’, 또는 ‘들통나다’로 다듬어 놓았다. ‘담배 한 보루’라고 할 때의 ‘보루’는, 두꺼운 마분지를 뜻하는 영어 ‘board’가 일본말화..

영어투 말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다. 앞으로 4년 동안 국민의 행복한 삶을 위해 헌신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국회의원 후보자들에게 ‘무엇 무엇이 요구된다’고 말해 왔는데, 이 말은 영어를 직역한 번역투 표현이다. 어느덧 우리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영어투 표현에 순응(?)하여 인터넷 에는 ‘요구되다’를 올림말로 수록해 놓았다. 하지만 본디 우리말에서 ‘요구’는 접미사 ‘하다’가 붙어 ‘요구하다’, ‘요구한다’처럼 쓰이는 말이다. 정치인들에게는 무엇 무엇이 ‘요구되는’ 게 아니라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요구되는 것은 국회의원들의 양심입니다.”라는 문장은, “지금 필요한 것은 국회의원들의 양심입니다.”처럼 다듬어야 한다. 이때 ‘필요하다’를 ‘필요로 한다’고 하면 이것도 영어식 표현..

마루 이야기

마루는 ‘고갯마루’, ‘산마루’처럼 가장 높은 부분을 말하기도 하고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을 가리키기도 하는 우리말이다. 그래서 멀리 수평선 한가운데 두두룩하게 솟아 보이는 부분을 ‘물마루’라 하고, 길바닥에서 가장 높이 솟은 부분을 ‘길마루’라고 한다. 마루는 자연이나 지형뿐만 아니라, 사람 몸의 ‘콧마루’나 한옥 지붕의 한가운데 가장 높은 부분인 ‘용마루’처럼 생활문화에서도 쓰이며, 글을 쓸 때 본문이 되는 부분을 ‘글마루’라 하듯 추상적 경계까지 넘나든다. 한자 ‘宗’의 훈이 ‘마루’이듯, 마루는 어떤 사물의 근본을 뜻하거나 가장 먼저 내세울 수 있는 기준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막다른 곳을 표현할 때에도 마루가 끼어든다. 이번 총선에서 한 끗 차이로 낙선했다고 아쉬워하는 후보들이 더러 있을..

산돌림과 재넘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산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말에는 산등성이, 산마루, 산모롱이, 산모퉁이, 산봉우리, 산비탈, 산자락, 산줄기 같은, 산에 관한 토박이말들이 무척 많다. 이처럼 산을 떠올리게 하는 우리말 가운데 산돌림과 재넘이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산의 일부를 가리키는 토박이말이 아니라, 각각 비와 바람의 이름이다. 산돌림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한 줄기씩 내리는 소나기’를 가리키는 순 우리말이다. 본디는 산기슭으로 돌아가며 잠깐씩 내리는 소나기를 산돌림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 비가 산 아래 마을로 옮겨가며 여기저기 흩뿌리게 되니까, 비록 산기슭이 아니더라도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내리는 소나기를 뭉뚱그려 산돌림이라고 부르게 된 것 같다. 재넘이는 ‘밤중에 산꼭대기에서 평..

개밥바라기

지난 4월 말쯤에 한 해 중 가장 밝은 금성을 밤하늘에서 볼 수 있었다. 금성의 거리가 지구와 가까워지면서 북극성보다 1000배나 밝은 빛을 뿌렸다고 한다. 이른 새벽 희끄무레하게 밝아오는 하늘을 비추는 금성을 우리 선조들은 ‘샛별’이라고 부르며 문헌에는 계명성(啓明星)이라고 적었다. 그렇다고 금성이 언제나 ‘샛별’인 것은 아니었다. 금성이 반짝이는 위치에 따라 특별한 우리말 이름을 하나 더 지어 주었다. 바로 ‘개밥바라기’이다. ‘개밥바라기’는 해 진 뒤에 서쪽 하늘에 반짝이는 금성을 가리키는 우리말이다. 어스름해진 하늘을 비춘다 하여 어둠별이라고 부르는 지역도 있었고 한자말로는 태백성이라고 했는데, 그 어느 이름도 ‘개밥바라기’만큼 운치가 있지는 않다. 우리 선조들은 음식을 담는 조그마한 사기그릇을 ..

심심하다

최근 일본군 위안부 성금 유용 의혹을 받고 있는 사회 지도층 인사가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데 대해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라고 말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대개 ‘심심한 사과’를 한다. 이 ‘심심한’은 대체 어떤 뜻으로 쓴 말일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맛이 조금 싱겁다.’라든가, ‘하는 일이 없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닐 것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고서야 이 말이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는 뜻을 지닌 ‘심심하다(甚深--)’란 한자말임을 알았다. 그런데 또 궁금해졌다. 대개의 한국 사람들은 매우 깊고 간절한 마음을 나타낼 때 ‘진심으로’, ‘깊이깊이’와 같은 부사어를 쓰고 있지 않은가? 나날살이에서 ‘진심 어린 위로 말씀’을 드리고 ‘깊은 사과 말씀’을 ..

존버나이트

어느 기업이 청소년층을 주요 판매 대상으로 한다며 ‘존버나이트’라는 음료를 출시했다. 음료 깡통에는 “ZONVER KNIGHT”라고 쓰여 있다. 당연히 영어에는 없는 ‘존버’가 무엇일까 궁금했고, 찾아보니 ‘존나 버티기’를 줄여서 쓰는 청소년 은어였다. 존나 버티기라니! 그 기업에서는 제품명에 ‘피로와 피곤함으로부터 잘 버틸 수 있도록’ 하는 의미를 익살스럽게 담았다고 발표했다. 언제부터 ‘존나’가 익살스러운 말이었던가. ‘존나 버티기’를 줄여 쓴 ‘존버’는 아무리 은어라고 해도 비속어이다. ‘존버’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그 본디말인 비속어를 떠올리게 된다. 청소년들이 사용하는 은어가 제품명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자유시장 체제에서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인지하는 비속어를 제품..

군달

끼니 외에 먹는 필요 없는 군음식을 군것질이라 하는 것처럼, 쓸데없다는 뜻이 담긴 접두사 ‘군-’이 붙은 우리말은 매우 많다. 앞일에 대해 쓸데없는 걱정을 하면 군걱정이고, 노래 부를 때 원래 악보와는 아무 관계없이 곁들이는 가락은 군가락이 된다.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왔다가 그걸 이루지 못하면 ‘헛걸음’이 되지만, 아무 목적도 없이 공연히 왔다면 그건 ‘군걸음’이 된다. 없어도 좋을 쓸데없는 것을 군것이라 한다. 그래서 없어도 되는데 쓸데없이 있어서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군것지다’고 나타낸다. “군것지니까 따로 연락하지 마세요.”, “우리 회사에 군것진 사람은 없습니다.”처럼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 관용구에 ‘군눈을 뜨다’는 말이 있다. “늘그막에 군눈을 떠 아내 속을 썩였다.”처..

개치네쒜

출퇴근길에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가장 두려운 것은 재채기이다. 알레르기성 비염으로 철이 바뀔 때마다 재채기와 콧물을 달고 살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 동안은 그저 민망할 뿐이었던 재채기가 코로나19 사태를 당하여 공포로 다가왔다. 좁은 찻간에서 코나 목구멍이 근질거리기 시작하면 식은땀이 난다. 마스크가 얼마간 공포의 방패 구실을 해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말에서 재채기 소리를 나타내는 소리시늉말은 흔히 ‘에취’로 쓰인다. 옛날에도 역시 재채기는 민망한 생리 현상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감기 걸릴 기미를 나타내기도 했으므로, 슬기로운 우리 한아비들은 재채기 뒤에 민망함을 덮고 감기를 내쫓으려는 느낌씨를 덧붙였다. 그게 바로 ‘개치네쒜’이다. “에취, 개치네쒜! 이놈의 감기 제발 좀 달아나라.” 하고 ..

손가락방아

책상에 앉아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잠길 때,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는 행동을 할 때가 있다. 또,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형사가 범죄 용의자를 심문할 때도 손가락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손가락 끝으로 탁자를 두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행위를 가리키는 순 우리말이 바로 ‘손가락방아’이다. 이 말은 주로 ‘찧다’라는 동사와 함께 ‘손가락방아를 찧다’, ‘손가락방아를 찧으며’처럼 사용한다. 손가락방아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손가락권총’이란 말도 있다.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만 펴고 나머지 손가락은 오그려서 권총 모양으로 하는 손짓을 가리키는 말이다. 손가락권총을 하고 손가락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발사될 염려가 있으니, 그냥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는 손가락방아로 범인을 심문하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