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 8

‘아기 부처’라 불린 신라의 불상

경주 남산에 가면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걸친 다양한 불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남산에 본격적으로 불상이 조성된 것은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 이후입니다. 이 가운데에서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은 이른 시기인 삼국시대에 조성된 불상입니다. ▲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 신라 7세기, 본존불 높이 165㎝, 보물 1924년 남산 북쪽, 장창곡 가까이 있는 석실(石室)에서 불상 한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불상 양쪽에 나란히 있었던 두 보살상은 이미 산 아래 민가로 옮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불상과 두 보살상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 분관으로 옮겨졌고,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 불교조각실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 경주 남산 장창곡 석실에서 발견된 불상, 건판22..

(얼레빗 제4892호) 조선시대 여성의 사치, 높이 30cm 다리

"옛사람이 다리(가체)를 높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궁중(宮中)에 이런 제도가 없었으니, (가운데 줄임) 풍속이 갈수록 사치스러운 데로 흘러 다리 한 꼭지의 비용이 자못 한나라 문제(文帝)가 말하는 열 집의 재산보다 많으니, 이는 곧 고려말의 퇴폐한 풍습이다.“ 이는 《영조실록》 90권, 영조 33년(1757) 12월 16일 기록으로 여성들이 치장을 위해 머리에 높은 가발을 얹는 풍조를 개탄하여 임금이 다리를 얹지 못하게 했다는 얘기입니다. 다리는 큰머리, 가체(加髢), 월자(月子), 월내(月乃)라고도 불렀는데 처음 문헌에 나오는 것은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로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리의 사치는 날로 심해져 성종 때는 높이가 무려 30cm까지 되었다고 하지요. 이때 다리의 ..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장엄구

사리는 ‘몸’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사리라(sarira)’를 음역한 말입니다. 인도에서는 사리를 모신 탑을 예배 대상으로 여겨왔습니다.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온 이래로 다양한 전각과 탑을 지어 부처를 모셨으며, 사리장엄구를 만들어 부처께 올리고 탑에 봉안했습니다. 한국은 ‘석탑의 나라’라 일컬을 만큼 석탑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석탑이 대다수지만, 벽돌을 쌓아 올린 전탑도 일부 확인되는데,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이 그 예입니다. 이 탑은 전탑이라는 특징 말고도 독특한 형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서 특히 눈길을 끕니다. ▲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장엄구, 통일신라 7~8세기, 전체 높이 22.3cm, 보물 전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석탑에 사리장엄구를 봉안하려면 석탑 부재의 한 부분을 파서 공간을 ..

비 오는 가을밤에 – 최치원, 「추야우중」

비 오는 가을밤에 – 최치원, 「추야우중」 가을바람 쓸쓸하고 애처로운데 秋風惟苦吟 세상에는 알아줄 이 별반 없구나 擧世少知音 창밖에 밤은 깊고 비는 오는데 窓外三更雨 등잔불만 고요히 비추어 주네 燈前萬里心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에 뛰어난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한시 「추야우중(秋夜雨中, 비 오는 가을밤에)」입니다. 6두품 집안 출신이었던 최치원은 신라에서는 아무리 뛰어나도 6두품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868년 12세의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납니다. 당나라에 간 최치원은 “졸음을 쫓기 위해 상투를 매달고 가시로 살을 찌르며, 남이 백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는 기록을 남길 만큼 열심히 공부했지요. 그 결과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합격했습니다. 이..

큰비로 백성이 죽어가는 데 불구경하듯 했던 현령

큰비로 백성이 죽어가는 데 불구경하듯 했던 현령 박회(朴回)에게 전지하기를, “내가 처음에 조운선(漕運船) 70여 척이 바람을 만나서 표류(漂流) 침몰(沈沒)하였다는 것을 듣고, 내 마음에 그 배에 탔던 천여 명의 사람이 다 빠져 죽었으리라 여겨, 아침저녁으로 진념(軫念)하였었다. 이제 너의 글을 보니 내 마음이 기쁘다. 네가 빨리 계달하여 나의 진념하던 심회(心懷)를 풀리게 하였음을 아름답게 여겨 특히 옷 한 벌을 하사하니, 너는 이를 영수할지어다.” 『세종실록』 25년(1443년) 6월 8일 기록입니다. 여기서 조운선(漕運船)이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때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물과 생활용품을 한양으로 운반하는 데 사용했던 배를 말합니다. 앞서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에는 해상왕 장보고가 뛰어난 배를..

나라땅 한가운데에 있는 중앙탑

나라땅 한가운데에 있는 중앙탑 충청북도 충주에 가면 우리나라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고 하여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부르는 국보 제6호 ‘중원탑평리칠층석탑中原塔坪里七層石塔’이 있습니다.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관과 잘 어우러진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의 돌탑으로, 당시에 세워진 돌탑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큽니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지요. 높은 탑신을 받치기 위해 넓게 시작되는 기단은 각 면마다 여러 개의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 역시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했습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들은 네 귀퉁이 끝이 경쾌하게 추켜올려 있어 자칫 무겁게 보일 수 있는 탑에 날렵한 기원을 불어넣습니다. 탑 꼭대기는 보통 하나의 받침돌 위에 머리장식을 얹는 신라 ..

신라 사람들, 여러 사람 코 때리기

신라 사람들, 여러 사람 코 때리기 ‘여러 사람 코 때리기衆人打鼻’, 술잔 비우고 크게 웃기飮盡大笑‘, ’얼굴 간지럼을 태워도 참기‘, 이게 뭘까요? 아이들 놀이의 하나? 아닙니다. 신라 사람들이 했던 나무주사위 놀이의 벌칙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나무주사위를 던져서 나오는 면에 적힌 벌칙을 따르는 놀이를 했는데 그 벌칙들이 재미 있습니다. 요즘의 ’러브샷‘처럼 팔을 구부리고 술을 마시는 ’곡비즉진曲臂則盡‘도 있지요. 모두 해학과 웃음이 넘쳤던 신라 사람들의 삶을 보여줍니다. 이 나무주사위 곧 주령구酒令具는 1975년 경주 안압지(월지)를 발굴하던 중 연못 바닥의 갯벌 속에서 발견된 유물로 정사각형 면이 6개, 육각형 면이 8개인 14면체입니다. 『안압지 발굴조사보고서』(1978년)에 보면 남북국시대(통일..

분노 대신 풍류와 해학으로 역신을 쫓는 처용무

서울(오늘날 경주) 밝은 밤에 밤늦게 노니다가 /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 가랑이가 넷이도다 / 둘은 나의 것이었고 / 둘은 누구의 것인가? / 본디 내 것이지만 /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오?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지었다는 8구체 향가 입니다. 이 처용가를 바탕으로 한 궁중무용 ‘처용무(處容舞)’가 있습니다. 처용무는 원래 궁중 잔치에서 악귀를 몰아내고 평온을 빌거나 음력 섣달 그믐날 나례에서 복을 빌면서 춘 춤이었지요. 『삼국유사』의 「처용랑 망해사(處容郞 望海寺)」 조에 보면, 동해 용왕의 아들로 사람 형상을 한 처용(處容)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 천연두를 옮기는 역신(疫神)에게서 인간 아내를 구해냈다는 설화가 나옵니다. 그 설화를 바탕으로 한 처용무는 동서남북과 가운데의 오방(五方)을 상징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