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11

(얼레빗 제4949호) 조선시대, 장애인도 정승 반열에 올라

조선시대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과 복지정책은 오늘날보다 훨씬 선진적이었는데 장애가 있어도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벼슬을 할 수가 있었지요. 예를 들면 조선이 세워진 뒤 예법과 음악을 정비하고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공을 세운 허조(許稠, 1369~1439)는 어려서부터 몸집이 작고 어깨와 등이 구부러진 꼽추였습니다. 하지만 허조는 태종이 선위할 때 '이 사람은 내 주춧돌이다.'라며 적극적으로 추천했고 결국 세종은 그를 좌의정에 올렸지요. 허조는 자기관리가 매우 철저했음은 물론 뇌물, 축재, 여색 등 부정부패와는 정말 완전히 담을 쌓은 벼슬아치였습니다. 자타공인 청백리인 맹사성조차 흑역사가 있었을 정도였지만, 허조는 정말 탈탈 털어도 먼지 한 톨 안 나오던 인물이었다. 이런 철저한 청백리 기..

(얼레빗 제4722호) 사팔뜨기 채제공, 임금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아

정조 개혁의 중심에 섰던 인물 번암 채제공의 초상을 보면 살짝곰보와 사팔뜨기 눈까지 숨기지 않고 그려 그가 못생긴 인물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거의 “죽기살기”라고 할 만큼 정확하게 그리는 조선시대 초상화 사실주의의 극치 덕분입니다. 번암은 그렇게 못생겼지만 28살에 사관인 예문관 한림(翰林) 시험에 수석을 차지한 뒤 죽기 한 해 전인 77살 때까지 은거한 7년을 빼고는 이조좌랑, 사헌부 지평, 한성판윤 등을 거쳐 영의정까지 오른 정말 큰 인물입니다. ▲ 살짝곰보와 사팔뜨기 눈까지 그대로 그린 채제공 초상, 65살 때(왼쪽)/73살 때 그런데 그가 이렇게 오랫동안 신임을 얻고 크게 탄핵을 받지 않은 까닭은 대부분 벼슬아치처럼 아부를 잘하거나 뇌물 공세 덕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청백리에 꼽힐 만큼 ..

청백리 인정받자 사양한 조사수

청백리 인정받자 사양한 조사수 소신은 천성이 본래 잔약하고 어리석어서 남에게 무엇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남들이 혹시 주는 것이 있으면 받아서 먹기도 하였으니 청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전하께서 너그러이 용납하시어 탐관오리를 면한 것만으로도 만족한데 사실과 달리 넘치는 이름을 얻고 보니, 이는 신이 하늘을 속이는 죄를 받을 뿐만 아니라 깨끗한 정사(政事)를 지향하는 전하께도 혹 누가 될는지 두려우며 몸 둘 바를 몰라 저도 모르게 이마에 땀이 맺히고 등에도 땀이 흐릅니다. 청백리의 이름을 지워주소서. 이는 유배지나 다름없는 제주목사가 되어 갔다가 제주의 문제점을 소상히 적어 올린 뒤 제주도 방어문제로 노심초사하던 임금에게서 청백리로 인정받은 송강(松岡) 조사수(趙士秀, 1502∼1558년)가 한 말입니다. 이..

정치적 식견이 큰 조선의 명재상, 황희

정치적 식견이 큰 조선의 명재상, 황희 역사상에 국가 민족을 위하여 끼친 공적을 말하자면 설총 선생의 이두,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문익점 선생의 목화재배, 김장 선생의 회례편람, 국방에는 양만춘, 을지문덕, 이순신 장군이요, 정치 식견에는 황희, 정도전, 이이, 정약용, 박지원을 꼽을 수 있다. 『삼천리』 제7권 제3호(19.5.3.1.) 중 「선구자를 우러러 위대한 사상의 큰 어른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정치적 식견에 탁월한 것으로 알려진 황희(1363∼1452년)는 의정부(議政府)에 24년간 있으면서 일처리는 대범하여 사리에 맞고 기본적인 것만 들으면 낱낱의 조항을 저절로 알아서 처리하지 못하는 일이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태종 때부터 세종 때까지 임금의 보살핌과 신임이 매우 중하여, 대소사를 막론하..

공신전을 백성에게 돌려준 청백리 이해

공신전을 백성에게 돌려준 청백리 이해 ‘공신전(功臣田)’은 고려·조선시대에 나라 또는 왕실에서 특별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준 땅을 말합니다. 특히 나라를 연다든지 새로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공로가 큰 신하에게 주는 경우가 많았지요. 조선시대에는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태조 때 책봉된 개국공신(開國功臣)을 비롯하여 태종·단종·세종·중종·인조·영조 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19회에 걸쳐 공신을 책봉하고 공신전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공신전은 개인 재산이 되어 상속이 가능할뿐만 아니라 세금도 면제되었습니다. 이 공신전을 받은 사람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때의 이해(李澥, ?∼1670년)도 있지요. 그는 반정의 공으로 개성부 유수 벼슬을 받은 것은 물론 공신전 150결(약 165만 평)을 받았습니다. 여의도 면..

판서를 부끄럽게 한 아전 김수팽

판서를 부끄럽게 한 아전 김수팽 조선시대 선비들은 청렴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특히 비가 새는 방안에서 일산(日傘)을 받친 채 “일산이 없는 집에서는 장마철을 어떻게 견디어 내나?”라고 했다는 유관(柳寬)은 조선조 청백리로 소문났지요. 이수광의 『조선의 방외지사』에 보면 청백리 벼슬아치 김수팽(金壽彭)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선 영조 때 호조 아전을 지낸 김수팽은 청렴하고 강직해 ‘전설의 아전(衙前)’이라 불렸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습니다. 호조 창고에 나라 보물로 저장한 ‘금바둑알 은바둑알’ 수백만 개가 있었는데 판서가 한 개를 옷소매 속에 집어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김수팽이 “무엇에 쓰시려고 하십니까?”라고 묻자 판서는 “어린 손자에게 주려고 한다”라고 대답했지요. 이에 김수팽은 금바둑알 한 움큼을..

(얼레빗 4373호) 백사 이항복의 가르침, 나오고 물러감의 철학

在郊那似在家肥(재교나사재가비) 교외에 있는 것이 어찌 집에서 살찌는 것만 하겠냐고 人笑冥鴻作計非(인소명홍작계비) 사람들이 기러기 세운 계획 잘못됐다 비웃지만 莫把去留論得失(막파거류론득실) 가고 머무름으로 얻고 잃음을 말하지 말라 江南水闊網羅稀(강남수활망라희) 강남에는 물이 넓고 그물도 드물다네 ▲ , 비단에 색, 156.3✕86.2cm, 국립중앙박물관 이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지은 ‘영정안(詠庭雁)’ 곧 “뜰의 기러기를 노래함”이라는 한시로, 벼슬에서 물러나 숨어 사는 것이 더 슬기롭다는 것을 기러기에 비유하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백사는 말합니다. 들판에 있는 것이 어찌 집에서 뒹굴뒹굴 살찌는 것만 하겠냐고 또 사람들이 기러기 세운 계획이 잘못됐다고 비웃지만, 나..

10월 22일 - 40년 정승살이에 남은 것은 비바람 피할 초가 두 칸입니다

"알았다. 40년 동안 정승 노릇을 하였는데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짜리 초가에 살다니 그의 청렴결백함과 안빈낙도함은 옛날에도 없던 일이다. 내가 평소 존경하고 사모하는 것이 공덕(功德)이 있어서일 뿐만이 아니다. 이 공(李公)의 청렴과 검소를 백관(百官)이 본받는다면 어찌 ..

(얼레빗 3809호) 자네는 군자가 되고 나는 소인이 되겠네

한국문화편지 3809호 (2018년 05월 03일 발행) 자네는 군자가 되고 나는 소인이 되겠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3809[ [신한국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문신인 백인걸(白仁傑, 1497∼1579)은 선조 때 대사간, 대사헌을 지냈고, 청백리로 뽑혀 기록되었습니다. 백인걸은 돌도 지..

(얼레빗) 3338. 임금 앞에서 영의정이 법도를 어겼다고 한 청백리 조사수

날마다 쓰는 한국문화 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다른 얼레빗 모두 보기 단기 4349(2016). 7. 25. 세종 때의 명신 조말생의 고손자 형제인 조언수와 조사수는 두 사람 모두 청백리였습니다. 특히 아우 조사수는 중종이 만조백관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청문(淸門), 예문(例門), 탁문(濁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