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왕실문화 인문강좌(국립고궁박물관) 57

세자의 대리청정 (2)

3. 왕세자의 조참 왕세자의 대리청정 절목을 보면 왕세자가 처음 대리청정을 할 때 조참을 한다는 규정이 있다. ʻ조참ʼ이란 국왕과 신하가 만나는 조회의 하나인데, 매월 아일(衙日, 1일, 6일, 11일, 16일, 21일, 26일)에 거행하는 조회이다. 이와 구분하여 매일 거행하는 조회는 상참이라 한다. 조참은 조선시대에 가장 널리 행해진 조회이다. 국왕이 정기적으로 거행했던 조참을 왕세자가 거행한 것은, 왕세자가 정치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일종의 신고식이었다. 효명세자의 조참의식은 1827년(순조 27) 2월 18일에 중희당에서 거행되었다. 먼저 순조는 인정전에서 문무백관으로부터 대리청정을 축하하는 인사를 받고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는 반교문을 내렸다. 이는 대제학으로 있던 김이교가 ..

세자의 대리청정 (1)

세자의 대리청정 김문식 (단국대) 1. 왕위 계승을 공식화하는 의식 국왕은 자신의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인 왕세자, 왕세손, 왕세제를 생전에 지정해 두었다. 이들은 국왕의 아들, 손자, 동생 가운데 한 사람이 선발되었고, 국왕이 주재하는 책봉식을 통해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로 공인을 받았다. 국왕의 후계자 가운데 가장 비중이 높은 사람은 왕세자였다. 왕세자와 관련된 의식에는 왕세자 책봉식, 왕세자가 성균관에 가서 교육을 받는 입학식, 성인식에 해당하는 관례, 국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돌보는 대리청정이 있었다. 다음의 는 왕세자들이 책봉, 입학, 관례, 가례(혼인), 대리청정을 한 나이를 정리한 것이다. 이를 보면, 왕세자들은 대부분 10세를 전후하여 책봉, 입학, 관례를 연속적으로 거행했다. 대리청정을 하는 ..

세자의 공간, 동궁 (3) - 세자 신분의 특수성과 의례

3. 세자 신분의 특수성과 의례 세자는 차기 왕위계승자를 미리 책봉하여 왕권 계승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ʻ사왕嗣王ʼ으로 예정된 인물이다. 따라서 몇가지 특수한 신분적 특징을 갖게 된다.(이효석, 2005 참조) (1) 세자로 책봉되어 즉위하거나, 사망하거나, 폐위될 때까지 존재하는 임시적 존재로서, 항상 존재하는 신분이 아니라 특정 기간동안 존재한다. (2) 세자는 궁궐 내에서 독립적 영역으로 인식되는 동궁이라는 공간에서 생활한다. (3) 세자는 신하의 입장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왕을 대신하는 입장이기도 하여 군신관계 로 보면 양면성을 띤다. (4) 세자는 대개 궁궐 내의 다른 인물들에 비해 나이가 어리다. 먼저, 세자의 재위기간이 연속적이 아니라 일시적이라는 점은 동궁이라는 공간이 항상 동일한 기능으..

세자의 공간, 동궁 (2) - 동궁의 위치와 구성

2. 동궁의 위치와 구성 개념적으로 동쪽에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더라도 그 위치가 명확하게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대 왕조의 궁궐에서는 동궁을 임금의 영역 동쪽에 조성하였다. 자금성 등 중국의 궁궐도 그러하고, 개경의 경우 『고려도경』에 ʻ동쪽 문에는 ʻ春德ʼ이라 편액했는데, 세자궁으로 통한다 ~ 좌춘궁은 회경전 동쪽 춘덕문 안에 있다. 왕의 적장자가 처음으로 책봉되면 세자라 하고, 관례 이후 여기에 거처했는데, 옥우의 제도는 왕궁만 못하다.ʼ라고 하여 세자궁이 명실상부하게 동쪽에 있는 동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궁 전각은 대체로 ʻ당堂ʼ호를 갖고 있다. 임금의 전각이 ʻ전殿ʼ으로 지칭되는 것과는 차등을 둔 것이다. 경복궁의 경우 임금의 전각은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으로 ʻ전호ʼ..

세자의 공간, 동궁 (1) - 동궁이란

세자의 공간, 동궁 조 재 모(경북대) 1. 동궁이란 왕세자의 공간을 보통 동궁東宮이라 부른다. 특별히 궁宮이라는 명칭을 쓴 것은 궁궐 내에서도 동궁이 별도의 구역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아래 『예기』의 글이 그 근거가 되었다. 禮記 內則 “由命士以上 父子皆異宮” 이는 왕명을 받은 사士 이상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다른 집을 쓴다는 것으로, 동아시아 궁궐에서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되었다. 즉, 동궁은 궁궐 안에 있던 밖에 있던 간에 아버지의 궁과는 별개로 인식되었다. 한편, 세자의 궁을 특별히 동궁이라 하는 것에는 아래와 같은 전거가 인용된다. 孔穎達(唐), “임금은 서궁에 있고 태자는 항상 동궁에 처한다.” 胡培翬(淸), “태자는 곧 장자이니 동궁에 거처하는데, 군주가 서궁에 있다는 것에 ..

세자의 교육 (7) - 체육 교육과 예술 교육

7. 체육 교육과 예술 교육 왕실 교육에는 체육과 예술을 가르치는 과정이 있었다. 먼저 체육 교육을 보면 어린 시절에는 건강을 위한 체조를 가르쳤고, 점차 성장하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혀야 했다. 활쏘기와 말 타기는 국왕이 갖춰야 하는 기본적인 기능이었다. 왕실에서는 대사례(大射禮)나 연사례(燕射禮)라 하여 국왕과 신하들이 어울려 활쏘기 시합을 벌이는 예제가 있었고, 국왕이 장거리 이동을 할 때에는 반드시 말을 타고 이동했기 때문이다. 국왕의 활쏘기 실력과 관련하여 정조에게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정조는 천부적이라 할 정도로 활을 잘 쏘았는데, 어떨 때에는 연속해서 만점이 나올 정도의 실력이었다. 1795년에 정조는 화성행궁에서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열었는데, 행사를 마무리하면서 신하들과 어..

세자의 교육 (6) - 지식을 중시하는 교육

6. 지식을 중시하는 교육 오늘날 교육이라 하면 지식 위주의 교육을 말하지만 왕실 교육에서는 지식보다 덕성 교육을 중시했다. 덕성 교육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단련한 후 지식 교육에 집중하게 하는 교수법 때문이다. 주자가 독서하는 방법을 말하면서 ʻ먼저 마음을 깨끗하게 쓸고 닦은 후에 책을 읽어라ʼ고 한 것도 같은 취지의 발언이라 하겠다. 왕실 교육의 내용은 경전 교육과 역사 교육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서(『논어』『맹자』『중용』『대학』) 삼경(『시경』『서경』『주역』)을 위주로 하는 경전 교육은 덕성을 함양하는데 치중했으며, 중국과 한국의 역사서를 익히는 교육은 역사적 지식과 안목을 갖추게 했다. 왕실 교육에는 오늘날의 중간고사 내지 기말고사에 해당하는 평가 시험이 있었다. 매일 교육을 하는 법강(法講) 시..

세자의 교육 (5) - 예제를 중시하는 교육, 입학례

5. 예제를 중시하는 교육, 입학례 왕세자 교육에서는 예제 교육도 중요했다. 조선의 왕세자는 장차 국왕이 되어 국가전례를 주관해야 했으므로, 사전에 다양한 예제를 익혀 두어야 했다. 따라서 왕세자는 국왕이 참석하는 국가전례가 있으면 국왕을 수행하여 현장 학습을 실시했고, 중국의 사신이 오면 왕세자가 주인이 되어 손님을 접대하는 절차까지 있었다. 왕세자가 국가전례에 참석할 경우에는 세자시강원의 관리들도 왕세자 옆에 배석했는데, 왕세자가 복잡한 의식 절차를 잘 익히고 원만하게 처신하도록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국왕이 주재하는 국가전례를 목격하는 것과는 별도로 왕세자가 직접 경험하는 통과의례도 있었다. 궁중에서 왕자가 성장하는 동안 많은 통과의례가 거행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을 거론하면 어린 왕자가 스승을 처음 ..

세자의 교육 (4) - 덕성을 중시하는 교육

4. 덕성을 중시하는 교육 왕자 주변에는 이미 좋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만 배치되었으므로 왕자는 이들의 말과 행동을 따라 배우며 덕성을 기를 수 있었다. 또한 왕자가 최초로 배우는 소학은 초학자가 오륜(五倫)을 습득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예절 교육으로 채워져 있었다. 『소학』에 나오는 예절 교육을 보면, 학생은 스승 앞에서 옷을 갖추고 자세를 똑바로 하도록 했으며,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부모님께 문안 인사를 올리고, 저녁이 되면 부모님의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게 했다. 또한 부모님이 식사를 하실 때에는 시선(視膳)이라 하여 음식의 맛이 좋은지 국이 식지는 않았는지를 살피게 했고, 부모님이 병환을 앓으시면 시탕(侍湯)이라 하여 한약을 달이는데 정성을 기울이고 약을 먼저 맛본 다음에 올리게 했다. 조선 왕..

세자의 교육 (3) - 환경을 중시하는 교육

3. 환경을 중시하는 교육 왕실 교육에서는 특히 환경을 중시했다. 산모의 태교가 환경을 중시하는 교육이었지만, 왕자의 유모를 선발하는 데에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왕자의 유모는 아이가 어린 시절에 가장 가까이에서 영향을 주는 사람이기에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유모는 민간인 중에서 후덕하고 건실한 성품을 가진 사람을 뽑았으며, 만약 천인 출신이라면 면천(免賤)이라 하여 양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키운 아이가 국왕이 되면 유모는 봉보부인으로 봉해졌다. 이는 종1품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육조의 판서보다 높은 직급의 자리였다. 어릴 때부터 가까이에서 지낸 국왕과 유모의 사이는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국왕이 목욕할 때 수발을 드는 사람이 유모였고, 왕비가 난산(難産)을 하면 국왕은 자기 유모를 보내는 것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