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왕실문화 인문강좌(국립고궁박물관) 57

세자의 교육 (2) - 최초의 교육, 태교

2. 최초의 교육, 태교 국왕과 왕비가 어렵게 만나 합궁을 하고 왕비가 임신을 한 것이 확인되면, 태아를 위한 태교(胎敎)가 시작되었다. 이이가 작성한 『성학집요(聖學輯要)』의 「교자(敎子, 자식을 가르침)」편을 보면 태교에 관한 구절이 있다. 옛날에는 부인이 아이를 임신하면 옆으로 누워 자지 않고, 비스듬히 앉지 않으며, 한쪽 발로 서지 않고, 맛이 야릇한 음식을 먹지 않았다. 사특한 색깔을 보지 않고,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으며, 밤이 되면 장님에게 시를 외우고 바른 일을 말하게 하였다. 이는 사대부의 부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태교를 중시하는 것은 왕실이든 민간이든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태교는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받는 최초의 교육이라고 하겠다. 태교는 태아가 성장하는 환경을 중시하는..

세자의 교육 (1) - 국왕을 규제하는 방법

세자의 교육 김 문 식(단국대) 1. 국왕을 규제하는 방법 국왕이라면 국가의 운명과 직결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되는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 살고 있지만, 조선의 국왕은 대통령보다 훨씬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가 있었다. 오늘날의 정부 기구는 입법, 사법, 행정 등 삼부(三府)로 나눠져 있고, 대통령은 그중에서도 행정부의 수반으로 일하고 있다. 그렇지만 국왕은 삼부를 총괄하는 최상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대통령의 임기는 5년 단임제에 불과하지만 국왕의 임기는 일단 왕위에 오르면 특별한 결함이 없는 한 평생토록 지속하는 종신직이었다. 국왕은 이처럼 막강한 존재였기에 제대로 된 국왕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국가의 운명은 극도로 위험해 질 수 있었다. 실록에서 장차 ..

조선의 세자 - 세자의 대리청정

7. 세자의 대리청정 대리청정(代理聽政)은 국왕이 건강상의 이유로 통상적인 정사를 돌보기 어려울 때 차기 왕위계승자인 왕세자[또는 왕세손]가 국정을 대신하여 다스린 것을 뜻한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ʻ청정(聽政)ʼ으로 불리었으며, 때로는 ʻ대리(代理)ʼ로 약칭되기도 했다. 대리청정 시 왕세자 및 왕세손을 소조(小朝)라 하고, 국왕을 대조(大朝)라 했다. 이는 대체로 군권 및 인사 등은 국왕이 여전히 보유하고 있으면서 대권을 행사하고 정사 실무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왕세자에게 허락된데서 연유한 것이기도 하다. 대리청정의 기원을 《춘관통고》에서는 정종(定宗)년간 왕세자[태종]의 군국기무(軍國機務) 장악으로 보고 있으나, 이는 향후 정착되는 대리청정기에 여전히 국왕이 군권 및 인사권을 장악하는 현상과는 전혀 다..

조선의 세자 - 세자의 혼례

6. 세자의 혼례 세자의 혼례(婚禮)는 가례(嘉禮)에 포함된다. 가례(嘉禮)는 원래 왕실의 큰 경사를 뜻하는 말로서 왕실의 혼인이나 책봉 등의 의식 예법을 모두 뜻했다. 《주례(周禮)》에서도 ʻ이가례친만민(以嘉禮親萬民)ʼ이라 하여, 가례(嘉禮)가 만민(萬民)이 참여하여 행할 수 있는 의식임을 설명했다. 그만큼 가례는 상하 모두가 함께 행할 수 있는 의례였다. 가례의 분류에는 본래 조정의 통상적인 예제 등이 폭넓게 포함되지만, 현존하는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등에서 사용되는 가례(嘉禮)는 왕실의 혼례에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만 본래 가례에 책례와 관례가 모두 포함되는 만큼 여기서는 ʻ왕세자의 혼례ʼ로 구분하였다. 조선시대 궁중의 혼례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조선의 세자 - 세자의 관례

5. 세자의 관례 관례(冠禮)는 성년식을 의미한다. 관례를 치르면 남자는 상투를 틀고 관을 썼기에 관례라 했다. 여자는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아서 계례(笄禮)라고 했다. 어린이와 성인은 머리모양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사대부가의 자녀인 경우, 결혼하기 전 15세~20세에 적절한 해의 정월에 날을 정해서 관례를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 관례를 치르는 사람은 《효경(孝經)》이나 《논어(論語)》에 능통하고 기본적인 예의를 익히고 있어야 했으며, 그 부모가 기년(1년) 이상의 상복이 없는 경우에만 거행할 수 있었다. 관례를 혼례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비록 미혼이더라도 관례를 마치면 성인으로서의 대접을 받았다. 성인이 되면 낮춤말을 함부로 쓰지 않았으며,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남자는 자(字)를, 여자는..

조선의 세자 - 세자의 책례

4. 세자의 책례 세자 책봉의식은 국왕이 자신의 후계자를 공식화하여 조선 팔도에 알리는 중대한 행사였다. 행사의 의미가 컸던 만큼 의식도 복잡하고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책례의(冊禮儀)는 가례(嘉禮)에 속한 의례로서 왕세자ㆍ왕세손ㆍ왕세제나 왕비ㆍ세자빈 등을 책봉하는 의식이었다. 관례나 혼례 같은 일생의례와는 달리 국가의 종통을 세우는 정치행위라고 할 수 있으며, 예치국가의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되었다. 특히 세자 책봉례는 책문(冊文)이나 교명문(敎命文)에 잘 나타나 있듯이 장차 천명에 의해 부여된 왕통과 교화를 책임질 군주로서의 지위를 계승할 권리를 세자에게 부여하는 의식이었다. 세자는 국가의 대본(大本)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그 지위에 부합하는 의제(儀制)가 마련되어 있었다. 조선시..

조선의 세자 - 세자의 탄생과 원자생활, 교육

2. 세자의 탄생과 원자생활 세자의 일생은 탄생에서 시작된다. 세자의 탄생을 위해 이미 지극한 정성을 들인 태교가 수행되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성군(聖君)이 되기를 원하는 바람 속에서 최고의 정성을 기울인 태교가 시도되었다. 조선초기부터 이와 관련하여 《태산요록(胎産要錄)》이 만들어졌고, 이후 《태산집요(胎産集要)》나 《태교신기(胎敎新記)》와 같은 기록이 저술되었다. 세자의 출산을 위해서도 조선의 왕실에서는 출산전담기관으로 비빈(妃嬪)을 위한 산실청(産室廳)과 후궁을 위한 호산청(護産廳)을 두었는데 산실청은 중전의 경우 3개월 전에 설치하며, 산실청 설치 기간에는 형벌 집행을 하지 않고 출산 후 7일째 되는 날 산실청을 폐지했다. 아직 세자가 되기 전 단계인 원자(元子)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보양청(輔養廳..

조선의 세자 - 세자란 누구인가

조선의 세자 정 재 훈 (경북대) 1. 세자란 누구인가 두루 알려져 있듯이 세자는 왕조시대 당대의 국왕을 이어서 다음 대의 국왕이 되는 후보자를 가리킨다. 세자를 가리키는 말은 동궁(東宮)ㆍ저궁(儲宮)ㆍ춘궁(春宮)ㆍ이극(貳極)ㆍ정윤(正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존칭어로는 저하(邸下)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세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세자인데, 이 용어는 원래 고려 말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 태자가 격하되면서 쓰이게 된 것이다. 세자 또는 태자는 우리 역사에서 이미 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다. 왕위의 부자세습이 결정되면서 자연스럽게 세자가 존재하게 되었고, 이후 대체로 장자로 결정되는 것이 관례였다. 고려 때의 〈훈요십조〉에서는 이를 규범화하기도 하였다. 즉, 적자(嫡子)에게 나..

대한제국 황실문화의 탄생 (2)

3. 근대주권국가로서 대한제국의 국가상징물들 대한제국은 만국공법 체제 하의 근대주권국가를 지향하는 것이었으나, 황제 즉위식을 비롯한 ‘화려한 군주’와 황실가족의 탄생 모습은 외형상으로는 일단 동양적 황제국의 복장이나 의례를 추수하는 것이었다. 대한제국 황제정과 황실문화가 구래의 중화제국의 황실문화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고종이 선망했던 유럽의 근대제국의 황실문화를 추구할 것인지 그것이 1897년 10월, 어렵사리 탄생한 대한제국 황제정 앞에 놓인 선택지였다. 황제 탄신일을 만수성절(萬壽聖節), 황태자 탄신일을 천추경절(千秋慶節), 황제 즉위일을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 태조 고황제(高皇帝) 등극일을 개국기원절(開國紀元節)로 기념일로 제정하고 태극기를 게양하며 축하연을 벌일 때도 그 명칭은 중국 명나라의 ..

대한제국 황실문화의 탄생 (1)

대한제국 황실문화의 탄생 서 영 희 한국산업기술대학교 지식융합학부 교수 1. 황제국 선포의 배경 1897년 대한제국의 탄생은 중국 중심의 전통적 동아시아 국제질서 관념으로 보면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원래 제국(帝國)의 군주를 의미하는 황제라는 칭호는 많은 나라들을 복속시키는 군주가 되고 나서야 이용할 수 있는 칭호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치유신 이후 근대 일본이 이미 동아시아적 계층질서를 부인하고 ‘제국’을 칭했듯이 대한제국 또한 주권국가로서 중국(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의 의지를 제호(帝號)로써 천명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국정운영의 면모를 일신하는 차원에서 칭제를 적극 추진했다. 칭제 상소에는 전․현직 관료층을 비롯하여 지방의 유학(幼學), 관학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