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왕실문화 인문강좌(국립고궁박물관) 57

조선 궁중음악의 종류와 특징 - 제례악

조선 궁중음악의 종류와 특징 서 인 화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장 1. 제례악 1) 종묘제례악 2) 문묘제례악 2. 연례 등의 의식음악 1) 당악: 낙양춘과 보허자 2) 정읍 계통 3) 여민락 계통 4) 영산회상 계통 5) 자진한잎 계통 3. 군례악: 대취타 조선시대 궁중음악은 의식에 따라 제례악, 연례 등의 의식음악, 군례악으로 분류할 수 있다. 연원에 따라서는, 향악, 당악, 아악으로 구분된다. 향악은 당나라, 즉 중국에서 들어온 당악에 대하여 그 이전부터 있던 음악과 그 양식으로 된 음악을 말한다. 아악은 고려 때 중국 북송의 휘종 황제가 대성아악을 보내면서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고, 음양오행의 상징을 담아내고 있다. 당악과 향악적인 음악들은 큰 편성의 악대가 연주하는 경우 반듯이 박을 쳐서 격식을 갖..

조선 궁중문화의 터전 궁궐 - 건물의 위계: 전당합각재헌루정

4. 건물의 위계: 전당합각재헌루정 궁궐에서는 위로 임금으로부터 최하층의 노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다양한 직무를 수행하였다. 기본적으로 그 사람들의 기거 활동 구역이 나뉘어 서로 섞이지 않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같은 구역 안에서도 건물들은 제각각 그 주인의 신분과 직임 및 건물의 용도에 따라 위계(位階)를 달리하였고, 위계에 따라 외형이 달라졌고, 기능도 달라졌다. 이러한 각 건물의 위계와 형태, 기능은 그 이름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 독립적인 건물에는 거의 이름을 지어 붙였는데, 이름의 앞부분은 고유명사인데 비하여 이름의 끝에는 건물임을 뜻하는 글자를 붙였다. 그 끝 글자들은 다양하지만 이를 간추려 보면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齋), 헌(軒), 누(樓), 정(..

조선 궁중문화의 터전 궁궐 - 궁궐의 짜임과 쓰임새

3. 궁궐의 짜임과 쓰임새 궁궐은 궁성(宮城)이라고 하는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궁성에는 요소요소에 문이 나 있다. 그 문들 가운데 대개 남쪽으로 나 있는 문이 으뜸가는 문, 대문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외부에서 들어온 신하들이 임금에게 충성의 의식을 치르는 공간인 외전(外殿)이 배치되어 있다. 외전은 다시 행각으로 둘러싸인 구역이 두 세 겹 겹쳐 있는데 가장 안쪽 구역이 외전의 중심을 이루는 주 행사장이다. 행각으로 둘러싸인 공간의 중앙에서 뒤편에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은 임금이 주인이 되는 공식 행사에 주로 쓰였다. 그렇게 용도가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법전(法殿)이라고 부른다. 또 이 구역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중심 건물이라는 뜻으로 정전(正殿)이라고 ..

조선 궁중문화의 터전 궁궐 - 궁궐의 역사: 양궐체제의 변천

2. 궁궐의 역사: 양궐체제의 변천 “서울에는 궁궐이 다섯이 있다”고 흔히 말하는데 이는 엄밀히 따지자면 틀린 말이 다. 왕국이 사라지고 임금도 사라진 오늘날 대한민국 서울에는 궁궐이 있을 수 없다. 예전에 있었다는 뜻이라면 궁궐이 아니라 고궁(古宮)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서울에 고궁이 다섯이 있다”고 할 수도 없다. 고궁이라고 하려면 어느 정도는 궁궐 모양을 갖추어야 할텐데 다섯이 모두 고궁 모양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서울에 있던 궁궐을 다 따지면 다섯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또한 그 다섯 궁궐이 동시에 있었던 적은 없다. 하나만 있던 적도 있고, 많을 때는 넷이 있기도 하였다. 궁궐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해갔다. 이러한 궁궐의 변천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

조선 궁중문화의 터전 궁궐 - 서울과 궁궐

조선 궁중문화의 터전 궁궐 홍 순 민 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 1. 서울과 궁궐 “침묘(寢廟)는 조종(祖宗)을 받들어 효성과 공경을 높이려는 곳이요, 궁궐은 존엄을 과시하고 정령(政令)을 내려는 곳이며, 성곽(城郭)은 안팎을 엄하게 구별하고 나라를 공고히 하려는 곳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나라를 소유한 이라면 마땅히 먼저 갖추어야 할 바입니다.” 태조 3년, 1394년 11월 3일 한양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한 뒤에 당시 관서들 가운데 가장 고위 관서인 도평의사사에서 올린 보고서의 내용이다. 임금은 왕조국가의 주권자이자 통치자였다. 임금이 거주하는 도시를 왕도(王都)라고 한다. 한국사에서는 왕도가 곧 수도(首都)였다. 왕도이자 수도인 도시에는 여타 도시에는 없는 시설물이 셋 있었다. 종묘와 ..

복식으로 바라본 조선 왕실 - 조선 왕실의 복식 관련 원칙과 경향

1) 왕의 복식을 따르다, 백관종상복(百官從上服) 조선시대 왕의 복식은 항상 문무백관 복식의 기준이 되었다. ‘모든 관리의 복식은 왕의 복식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때 왕의 복식을 따른다는 의미는 왕과 똑같이 입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례의 내용과 성격, 인물의 역할, 왕과의 상호관계에 따라 정해진 복식을 입었다. 즉 왕의 복식을 그대로 따라 입는 것이 아니라 왕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에 따라 신하가 입어야할 옷이 정해졌다는 의미이다. 왕과 신하 복식의 관계는 법전인 『대전회통(大典 會通)』에 기록되어 있다. 왕이 면복이나 강사포를 입을 때 백관은 조복(朝服)을 입고, 왕이 면복에 방심곡령을 더하면 백관은 조복을 입고 제관(祭官)과 향관(享官)은 제복을 입으며, 왕이 곤룡포나 무양흑원룡포를 입을 때 백관은 ..

복식으로 바라본 조선 왕실 - 왕비의 복식

2. 왕비의 복식 1) 왕비의 의례별 복식 왕비 역시 각 의례에서 착용하도록 정해진 복식이 있었다. 왕비의 예복으로는 적의(翟衣), 국의(鞠衣), 원삼(圓衫), 당의(唐衣)를 들 수 있다. 적의는 조선 왕실에서 최고 통치자의 적통을 잇는 여인만 착용 가능한 최고의 예복으로서 책봉 받을 때, 조회 때, 존호를 받을 때 착용하였다. 꿩무늬가 특징이어서 적의, 적관처럼 명칭에 꿩 적(翟)이라는 글자가 들어갔으며, 적의 뿐 아니라 하피, 배자, 폐슬에도 꿩무늬[翟紋]를 직조하거나 부금(付金)하였다. 왕의 면복이나 원유관복처럼 규‧수식(首飾)‧적의‧ 상‧하피‧대대‧옥대‧패‧수‧폐슬‧말‧석까지 십 여 가지 품목을 모두 갖추었을 때 완성되었다. 시대에 따라 품목이나 특징이 변화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중국 명(明)에서..

복식으로 바라본 조선 왕실 - 왕의 복식

복식으로 바라본 조선 왕실 - 조선 왕실의 옷장을 열다 - 박 가 영 숭의여자대학교 패션디자인과 교수 궁중에서 왕에게 올리는 밥을 높여서 수라라고 이르듯이, 왕의 옷을 높여서 의대(衣襨)라고 하였다. 왕 뿐 아니라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의 옷과 장신구, 옷을 만드는 재료, 침구류에 이르기까지 총칭하는 단어가 의대이다. 한편, 법복(法服)은 궁중의례 때 예법에 맞추어 규정대로 착용하는 복식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매일 원하는 옷을 마음대로 골라서 입을 수 없었고, 시간과 장소와 상황, 즉 의례에 따라 각 신분별로 착용해야 할 복식이 정해져 있었다. 자세한 규정은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같은 법전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와 같은 전례서에 정리되어 있었으며, 이 기본원칙을 바탕으로 선례를 확인하면서..

영조대 왕실의 식생활 - 장수한 영조가 즐겼던 음식들

영조의 어머니는 무수리 출신으로 알려진 숙빈(淑嬪) 최씨(崔氏, 1670~1718)이다. 아버지 숙종은 첫 왕비와 계비로부터 아들을 얻지 못하고 훗날의 희빈(禧嬪, 1659~1701)이 된 나인 장씨와의 사이에서 경종(景宗, 1688~1724)을 낳았다. 그 후 숙종은 희빈에게 불만을 느꼈고, 그즈음 무수리였던 숙빈 최씨가 숙종의 총애를 얻기 시작했다. 이런 정국 속에서 영조는 1694년(숙종 20) 음력 9월 13일 새벽에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태어났다. 6세 때 연잉군 (延礽君)에 봉해진 영조는 커가면서 왕실에서 본인이 처한 위태로운 위치를 알기 시작했다. 더욱이 연잉군은 몇 차례 잘못된 행동 때문에 숙종으로부터 질책을 받아 눈 밖에 났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숙종 사후에 소론의 지원을 받은 경..

영조대 왕실의 식생활 - 왕의 장수를 책임진 사람들

왕실은 왕과 그 친인척이 생활하면서 국가를 통치하는 공간이다. 당연히 의식주는 물론이고 각종 의례와 관련된 행정조직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 중에서 사옹원(司饔院)은 왕과 그 가족의 식생활을 지원하는 행정부서였다. 이에 비해 내의원은 왕실의 의약을 책임진 부서였다. 이들 두 부서는 왕과 그 친인척이 궁중에서 생활할 때 마련해야 할 음식과 약재, 그리고 치료를 맡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두 부서가 바로 왕의 장수를 위해서 마련된 조직이었다. 사옹원의 출발은 조선 초기에 사옹방(司饔房)에서 시작되었다. 『태조실록』 8권에는 1395년 (태조4) 9월 29일에 “대묘와 새 궁궐이 준공되다. 그 규모와 구성 및 배치 상황”을 소개하면서 사옹방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 밖에 주방(廚房)·등촉방(燈燭房)·인자방(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