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판전 현판
붓글씨에 관한 한 따라올 사람이 없다는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 한데 그가 천하의 명필이 되기까지 낯선 유배지에서 쓰라리고 고독한 시간 속에서 자신을 담금질하면서 부단히 노력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합니다. 그는 화날 때에도 붓을 들고, 외로울 때도 붓을 들었으며, 슬프고 지치고 서러움이 북받칠 때도 붓을 들었다지요. 그리고 어쩌다 한 번씩 반가운 편지와 소식이 올 때에는 자다가도 일어나 붓을 들었다고 합니다.
추사 김정희는 1786년 6월 3일 충청남도 예산에서 병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난 24살 되던 해에 청나라 연경(燕京)에 가서 당시 이름난 학자인 완원, 옹방강에게 금석학과 실학을 배우고 돌아옵니다. 6살 때부터 입춘첩(立春帖)을 써 붙인 글씨가 예사롭지 않음을 실학자 박제가가 보고 명필이 될 것이라 예언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다만 그가 명필가의 반열에 오른 것은 부단한 자기 노력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중국의 비석 글씨 309개를 베끼고 베끼면서 고전과 글씨를 익혔고 70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벼루 열 개를 갈아치우고, 붓 1,000자루를 닳도록 썼다고 하지요. 한번은 친구 김유근이 자신의 벼루에 추사의 글씨를 새기겠다고 글씨를 부탁하자 추사는 마음에 들 때까지 글씨체를 연습했다지요. 또 후배 윤정현이 붓이름(호)를 써달라고 하자 윤정현이란 인물에 걸맞은 글씨체를 찾으려고 고민하다 무려 30년 만에 글씨를 써주었을 정도로 자신의 글씨에 철저했습니다.
흔히 추사체는 변화무쌍함과 괴이함에 그치지 않고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추사는 죽기 3일 전까지 글을 썼는데 봉은사 판전(版殿)이란 글씨가 그것으로, 이는 아무 기교도 부리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느껴진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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