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레빗) 3224. 천만 길의 큰 참빗으로 탐관오리를 쓸어버려야

튼씩이 2016. 2. 16. 21:01

날마다 쓰는 한국문화 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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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9(2016). 2. 16.



“木梳梳了竹梳梳 얼레빗으로 빗고 나서 참빗으로 빗으니
亂髮初分蝨自除 얽힌 머리털에서 이가 빠져 나오네.
安得大梳千萬尺 어쩌면 천만 길의 큰 빗을 장만하여
一歸黔首蝨無餘 만백성의 이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까.“

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설화 문학가로 설화집 《어우야담(於于野譚)》을 쓴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영소(詠梳, 얼레빗으로 빗고 나서)”라는 한시입니다. 여기서 얼레빗은 빗살이 굵고 성긴 큰 빗으로 반달모양으로 생겨서 월소(月梳))라고도 하지요. 또 참빗은 빗살이 매우 촘촘한 빗으로 얼레빗으로 머리를 대강 정리한 뒤 보다 가지런히 정리하거나 비듬ㆍ 이 따위를 빼내기 위해 썼습니다.

재미난 것은 백성들을 괴롭히는 탐관오리 들을 이(蝨)에 비유하여 읊은 것입니다. 권력에 기생하여 위로 아부하고 아래로 군림하여, 백성의 고혈을 빠는 간악한 관리를 슬관(蝨官)이라고 하지요. 이런 슬관을 참빗으로 이를 가려 뽑듯 철저히 가려 없애버려야 백성이 편히 살 수 있음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신랄한 풍자시입니다. 유몽인은 문장가 또는 외교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전서(篆書)ㆍ예서ㆍ해서ㆍ초서에 모두 뛰어났지요. 억울하게 몰려 처형을 당했던 유몽인은 정조 때 시호를 받고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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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악속풀이 250 >

정득만 명창, “그 장구채 이리 내거라”



지난주에는 변방잔존(邊方殘存)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 말의 뜻은 대도시나 중심지는 그 시대 상황에 따라 늘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옛 문화를 접해보려면 변두리 지역이나 또는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외국이어야 더욱 확실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이태리의 스파게티를 먹으려면 미국 뉴욕의 리틀 이태리에 가던가, 한국의 옛 음식을 먹으려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가야 된다는 의미가 된다.

1935년에 제작한 《조선어독본》이라는 고음반 6매는 지난 2004년에 CD음반으로 다시 제작되었는데, 그 내용은 당시 사범부속초등학교 학생들이 책 읽는 방법을 실제 녹음한 것이라는 이야기, 지금이라도 책 읽는 방법을 전국 지역으로 확산해야 하고 가능하다면 북한이나, 연변지역, 또는 세계에 나가있는 교포들까지도 확산해야 송서율창의 확산 운동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또한 훈민정음 스물여덟글자 중 지금은 스물네 글자만 쓰고 있는 점에서 우리의 표현 영역이 축소되었다는 이야기, 사람의 소리는 영혼의 소리여서 축문이나 종교의 의식에서 소리 내며 읊는 전통이 이어진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그 외의 송서 율창과 관련하여 발표된 내용들은 다음기회에 소개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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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일제 말기, 주로 경서도 소리꾼들의 집합체였던 <가무 연구회>와 경서도 명창 정득만(鄭得晩)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가무 연구회>는 당시 유명한 공연장이었던 부민관(지금의 서울시의회)에서 발표회도 열었고, 서울이나 지방을 다니며 흥행을 위한 공연 사업을 벌여 수입을 얻기도 손해를 입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인가 공동의 목적을 위해 서로의 뜻을 모았다는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인 것으로 보인다. <가무 연구회>가 자체발표회를 할 경우나 또는 흥행을 위한 공연을 할 경우에 산타령을 불렀다고 하는 이창배와 정득만은 단연 이 단체의 막내들이었다. 벽파 이창배에 관해서는 본란에서 여러 차례 얘기해 왔으므로 생략하고, 정득만에 관한 소개를 간단하게 해 보도록 한다.

무엇보다도 정득만은 선소리 산타령이 1968년,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최초의 예능 보유자 5인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벽파와 함께 활동하고 전승활동도 함께 했다. 30년대 중반 이후, 80년대 초반까지 언제나 벽파 이창배와 함께 지내며 경서도 소리의 중흥을 위해 애쓴 명창이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경서도 소리를 하기에 적합한 맑고 높은 목소리를 천부적으로 받고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는 목소리가 좋았기에 주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해서 였는지 어린 시절부터 노래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그가 본격적으로 음악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세 무렵 문세근에게 배우기 시작하다가 그 뒤 이름난 학강 최경식에게 가사ㆍ시조를 비롯한 12잡가 등을 배우면서부터이다. 정득만은 특히 12잡가 중에서도 다소 어렵다고 하는 적벽가를 잘 불렀다. 숨이 길고 청이 높아서 여자들과 함께 불러도 충분할 정도로 목을 잘 타고 났으며, 그 위에 남다른 애정으로 경서도 소리를 지켜온 사범이다. 사설지름시조를 즐겨 불렀으며 긴잡가 중에서는 유산가, 소춘향가, 제비가 등이 일품이었고, 일반 민요로는 노랫가락, 건드렁타령, 금강산타령, 풍등가 등을 잘 부른 명창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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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활동하고 있는 한국의 경서도 명창으로 벽파 이창배와 정득만의 지도를 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로 이 분야의 절대적인 공로가 있는 분이 또한 정득만 명창이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휘몰이잡가>의 예능보유자로 활약하고 있는 박상옥씨의 말에 의하면 선생의 소리 가운데 조르는 목은 누가 흉내를 내지 못했다고 전하며 소리의 강약이 분명해서 맛깔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 소개한다. 하루는 박상옥이 그의 교습소에서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는 중인데, 정득만 선생이 찾아 오셨다는 것이다. 얼른 일어나 인사를 드리니 “그 장구채 이리 내거라” 하면서 박상옥이 앉아있던 자리에 앉으셨다. 장구채를 선생께 드리고 옆으로 비켜나 서 있으려니까 선생은 장구의 변죽과 복판을 몇 번 쳐보시면서 박상옥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란다.

“내가 네 제자들을 가르치려고 온 것이 아니라, 너 가르치려고 온 거야! 너 요새 공부 등한시 한다는 소리 듣고 달려 온 것이니 너 여기 앉아서 너 부터 공부하거라.”하면서 맨 앞자리에 앉게 하셔서 아주 난감한 적이 있었다는 경험담을 전해 준다. 그만큼 제자를 아끼고 경기소리의 내일을 걱정하셨던 선생이 또한 정득만 선생이었다는 점을 이 일화는 잘 전해주는 것이다.

그는 경서도 지방의 선소리, 좌창, 민요 등을 모두 섭렵한 명창이었다. 정득만이 부르던 산타령은 과천패의 모갑이 소완준이 전해준 산타령이었다. 산타령의 경우, 함께 활동하던 이창배는 왕십리패의 모갑이 이명길에게 배웠으므로 과천패의 소완준에게 배운 정득만의 사설이나 가락과는 부분적으로 약간씩 달랐던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이창배와 정득만 두 사람 만의 문제가 아니다. 당시의 산타령 명창들은 그 지역의 소리꾼들이 전해오는 대로, 혹은 그들의 선생이 전해주는 대로 전해 받아서 다른 지역의 노래와는 음악적 차이를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르다고 하는 것은 어느 쪽이 맞고 어느 쪽이 틀린 문제가 아니다. 산타령뿐이 아니라 긴잡가나 휘모리 잡가, 일반 민요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다만, 사설의 정확한 이해 없이 불분명한 발음이 습관이 되어 앞부분과 뒤 문장의 뜻이 통하지 않는 가사는 혼자 부르는 노래가 아니기에 교정이 필요했다. 여럿이 함께 부르는 산타령의 경우, 가사가 다르다든가 가락이나 장단, 기타 잔가락이나 시김새가 서로 다르다면 이는 합창이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고민해 오던 벽파 이창배는 우선 사설만이라도 통일시키기 위해 《가요집성》이라는 사설집을 저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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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한 범 / 단국대 명예교수, 한국전통음악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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