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은 1882년 발행된 관보 《한성순보》였으며, 최초의 민간신문은 《독립신문》이었는데 그때까지 기자들은 모두 남자들뿐이었습니다. 그 뒤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1910년 창간한 <매일신보>는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 식민지화를 선동하는 신문이었지요.
그 《매일신보》가 조선 언론 처음으로 여기자를 채용하려고 “… 개화된 여성으로 현명하면서도 여러 가지 지식이 있는 20~30세가량의 고등보통학교 졸업 정도에 글재주가 있는 기혼 부인을 구함”이란 광고를 냈습니다. 이 광고를 통해 1920년 9월 17일에 처음 채용된 사람은 이각경으로 <조선 가정주부께>라는 논설을 처음 썼는데, 긴 치마와 고무신 차림으로 많은 이름난 사람을 대담했다고 합니다. <매일신문> 창간 20여 년 뒤에 나온 잡지에도 여기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1935년 3월 《개벽》 신간 4호에 <여기자군상>이란 글이 그것이지요. "남성 본위로 조직된 이 사회는 신문사도 역시 남성 본위로 되엿기 때문에 기자도 殆(태)히 전부가 남자요 혹 여기자가 있다고 해도 그야말로 萬綠叢中(만록총중) 一點紅(일점홍) 격으로 한 社(사)에서 花草記者(화초기자)로 한 사람 박게 더 두지 안코 또 여기자 자신도 환경관계로 1년 이상을 續勤(속근)한 사람이 별로 없으며 따러서 그 활동 성적도 이렇다할 사람이 또한 별로 없다. 그러나 이번 호가 신문특집호이니 신문사에서 생색으로 여기자 채용하는 것같이 여긔에도 생색으로 여기자 군상을 쓰기로 한다. 그러나 재료가 너무 빈약하니 생색이 날지 의문이다"
당시만 해도 여기자는 '화초기자'요, '생색기자'로 구색을 갖추기 위한 존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자 군상'을 쓰려 해도 자료가 빈약하다는 말이 재미납니다. 지금은 여자들의 직업분야가 다양하고 여기자 역시 보편화되어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루게 되었지만 그땐 그만큼 여자의 직업이 시원치 않았음을 시사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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