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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궐에는 “세답방(洗踏房)”이란 곳이 있었습니다. 세답방은 옷이나 이불을 빠는 것은 물론 염색 · 다듬이질 · 다리미질까지 담당했던 곳을 이릅니다. 곧 궁궐 내 세탁소라고 하면 될 것이지요. 이곳의 궁녀들은 옷감에 따라 어떻게 옷을 다듬어야 하는가에 대해 꿰뚫고 있어야 하고, 무명천일 때와 베옷일 때, 비단일 때 맞는 다리미 온도를 감지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직접 염색까지 했어야 했으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궁궐에서 또 특이한 곳으로는 “복이처(僕伊處)”란 곳이 있었습니다. 복이처는 내전 아궁이 불 때기, 등불 켜기와 그 관리를 하였는데 이를 담당하는 이들은 조라치(照剌赤)라 하여 내시의 몫이었지요. 그런데 일제에 나라를 뺏긴 뒤 내시제가 폐지되자 그 일을 궁녀가 맡게 되었는데 이들을 “복이나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밖에 궁궐에는 임금과 왕비가 입는 옷은 물론 이불, 누비보 같은 것들을 바느질하는 “침방"이 있지요. 또 옷과 이불 그리고 주머니와 병풍에 이르기까지 자수를 담당하던 "수방", 임금이 평상시에 마시는 각종 음료와 죽, 잔치 때 쓰는 과즐(한과)을 만드는 "생과방", 수라상에 올리는 밥과 반찬을 담당하는 "소주방"도 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전문직에 해당하는 일을 궁녀들이 정성으로 해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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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악속풀이 25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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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제홍-함재운-함화진으로 이어진 아악의 명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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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8.15광복이 궁중음악계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광복 전에는 이왕가의 보호를 받던 아악부마저도 신분 보장이 되지 않아 다른 직장을 찾아 떠나가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러나 조선총독부 내에 어용단체였던 <조선음악부>는 징용이나 노무 동원이 면제되는 대신, 농어촌이나 광산, 전방을 쫓아다니며 위문공연을 해야 되었다는 이야기, 조선시대에는 음악관장기관의 명칭이 장악원(掌樂院)이었으나 일제하에서는 이왕가의 아악부로 격하되었고, 아악부의 최고 책임자를 국악사장이라 부르면서 국악이란 용어가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190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770여명의 악인이 있었으나 해마다 감축이 되어 아악부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끝내는 아악부의 폐지가 기정사실화 되었다는 이야기, 이러한 상황에서 1917년《조선악개요》를 써서 일본 악부(樂府)에 전했는데, 이를 확인한 일본 음악인 상진행이나 전변상웅(田邊尙雄-다나베 히사오) 등은 이왕가의 아악이야말로 예술성이 높은 음악임으로 아시아의 자랑, 세계의 자랑거리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일본정부에 건의하였다는 이야기, 그리고 조선시대의 악사 충원은 세습(世襲)제도였다가 1919년부터 일반 공모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으며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중지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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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명완벽 아악사장이 6명의 노악사들과 아악부의 잔무처리를 하고 있을 당시는 1920년대 초였다. 아악부의 입장에서 보면 이때가 일제의 강점기 중 가장 비참했던 시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도 아악부와 동물원 가운데 어느 것을 폐지할 것인가 하는 수치스러운 모멸감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고, 끝내는 아악부를 없애기로 결정을 했다는 점이 감내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동물원을 살리고 아악부를 폐지하겠다는 속뜻은 한국의 전통문화, 조선의 정체성을 파괴하겠다는 간악한 속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천년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고 했다. 신라시대 음성서(音聲署)이후, 1,500년을 이어온 음악기관이 끝내 문을 닫게 된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고 있었던 당시의 아악사장 이하 노악사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러나 한국의 전통음악은 생명력이 강한 음악이어서 그렇게 무기력하게 단절되는 음악이 아니라는 걸 일본인들은 증명하고 있었다.
조선의 아악은 일본인을 감동시키었고, 아악부는 다시 활력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다. 참으로 하늘이 도왔고, 선대의 음악인들이 지켜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려운 시대를 넘기고 제4대 아악사장에는 김영제, 그리고 이어서 제5대 함화진이 아악사장에 올랐다. 이들은 악기나 악보, 악사의 확충 등, 아악부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 온 것이다. 전 국립국악원장 성경린의 말이다.
“다사다난했던 시절에 아악을 보존하고 전수한 업적은 김영제, 함화진 양씨의 공이 절대하였다. 특히 김영제는 관악보를 정리하고 악기를 보수하였으며 이론면의 개척에 공이 크고, 함화진은 이론과 실기를 겸한 거벽으로 아악보급에 용력하여 당시 이화여자전문학교에 국악강좌를 처음 열었다. 그리고 만주에서 발주하여 온 편종과 편경, 등 악기제작을 독당하여 수출하는가 하면, 아악연주회를 부민관에 가져 일반에게 아악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제4대 김녕제(金寗濟) 아악사장은 초대 김종남 국악사장의 양손으로 가야금의 명수였고, 궁중무용인 정재도 능숙하였으며 특히, 악보의 정리나 기보법을 개량하였던 인물이었다.
악보는 연주자들 사이에 정확한 약속임에도 불구하고 대략적인 음을 설정해 놓고 각 악기가 함께 유니손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시 말해 합주의 경우, 피리가 가는 길이 있을 것이고, 대금과 해금, 각 악기들의 선율이 독창적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악보는 대체적인 음을 명시해 놓고, 각 악기가 뒤섞여 함께 연주하는 형식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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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방법에서 김녕제는 각 악기의 가락이나 시가(時價)을 구분 표기하였던 것이다.
또한 함화진은 2대 아악사장을 지낸 함재운의 아들이며 단소 잘 불기로 유명했던 함제홍의 손자이다. 그의 할아버지 함제홍은 단소를 너무나 잘 연주해서 사람들이 그의 이름은 기억은 못하고 성씨만 따서 <함소> 함소라고 불렀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함제홍-함재운-함화진으로 이어진 가문은 아악의 명가인 것이다.
집안의 내력이라고 할까? 함화진 역시 국악의 실기와 이론에 두루 밝았다고 전한다. 거문고는 이병문에게 배웠고, 가야금은 제3대 아악사장을 지낸 명완벽에게 배웠다. 특히 그는 악리(樂理)에 밝아서 아악생 양성에 필요한 악서 편찬을 많이 하였는바, 교재용 등사본으로 《아악개요》, 《악기편》, 《이조악제원론》, 《증보가곡원류》, 《조선음악통론》, 《조선음악소사》 등이 대표적이다. 앞에서도 소개한 바와 같이 그는 광복 이후, 국악원(후에는 대한국악원)을 창설하고 초대 원장을 맡아 국악발전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광복 직후, 아악부는 구왕궁의 소속이 되었지만, 그 운영에 있어서나 활동에 있어서는 매우 제한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궁(宮)안에서 임금을 위한 의식음악이 일반 민중들에게는 생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흥겨운 민속음악이야 자리를 잡고 판을 벌이면 사람들이 모여들고 함께 즐겨 재미와 흥행이 가능했지만, 대궐 안에서 주로 의식과 관련된 궁중음악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음악회로는 흥행이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국립국악원 초창기 시절에도 국악감상회 주요 곡목들은 전반부에는 정악위주로 진행하다가 후반부에는 산조나 민요 판소리 등 민속악 연주자들을 대거 초빙하기 시작한 것이다.
형식을 중요시하고, 템포가 느린 그리고 표현의 절제를 이상으로 삼는 음악의 성격상, 대궐의 음악이 일반인들을 사로잡기에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이다. 그럼에도 광복을 맞이한 아악부의 책임자들이나 악사들은 앞으로 아악부가 여러가지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큰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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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한 범 / 단국대 명예교수, 한국전통음악학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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