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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요는 백성 사이에서 저절로 생겨난 노래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노래입니다.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일풍속놀이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지역이나 부르는 사람의 취향에 맞게 또는 즉흥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요. 민요는 부여, 고구려, 삼한 때부터 있었다고 봅니다. 민요는 크게 놀이요, 노동요, 의식요로 나누기도 하지요.
그 가운데 노동요는 농사를 지으면서 부르는 농요와 또는 고기잡이를 하면서 부르는 어업요가 보통인데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2호 <가거도멸치잡이노래>도 어업요의 하나입니다. <가거도멸치잡이노래>는 재래 선박인 걸레를 타고 흔히 밤에 멸치잡이를 하면서 부르던 9곡(曲)으로 엮어진 모음곡형식의 노래입니다.
우두머리인 이물사공이 등불을 잡고 뱃머리에 섰다가 멸치떼를 발견하면 그쪽으로 노를 저으라고 합니다. 적당한 곳에 다가서면 이물사공의 “그물 내려라-”하는 외침에 따라 멸치떼 위에다 그물을 내릴 때의 소리, 그물 안의 멸치를 배에 퍼담는 작업을 하며 부르는 술배소리, 그물을 거두고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부르는 소리 그리고 마을 어귀에 도착하여 부르는 배치기노래들을 부르는 것입니다. “만경창파 노는 멸치, 우리가 널 모를 손가, 너는 죽고 나는 살자” 하는 구성진 어민들의 “가거도멸치잡이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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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악속풀이 2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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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춘, 정득만 덕에 재담소리와 인연을 맺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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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백영춘이 <청구고전성악학원>의 벽파 이창배선생을 찾아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남자 제자가 흔치 않던 시기여서 그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이야기, 벽파의 수업 방식은 성악의 기초를 정가(正歌)라고 생각하고 시조나 가사, 때로는 가곡도 지도하면서 발성이나 호흡을 강조한 다음, 선소리 산타령이나 좌창 등을 지도했다는 이야기, 그것도 실기와 함께 이론적 배경, 즉 민요의 역사, 종류, 사설의 이해, 고어(古語)풀이 등 이론적인 바탕을 지도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뿐난 아니라 벽파선생의 강의는 언제나 풍부한 내용으로 재미있고 교훈적이었으며 판서 자체가 너무 멋있어 수업이 끝나도 지우지 못했다는 이야기, 이러한 영향을 받은 백영춘 역시 제자들에게 폭 넓은 소리의 세계를 안내해 주고 있다는 이야기, 백영춘은 스승의 뜻을 받들어 소리공부와 장단 등 모든 과정을 마치면서 강습과 각종 공연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1975년, 국악협회가 주최한《전국민요경창대회》에서 당당하게 장원을 하였고 다음해에 이수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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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그가 재담소리와 만나게 된 배경을 이야기 해 보기로 한다.
백영춘이 재담소리와 인연을 맺게 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정득만(1907~1992) 명창이라 하겠다. 평소 다른 누구보다도 백영춘의 목이나 소리 실력을 칭찬해 주었고, 연기의 가능성도 인정해 주고 있었기에 백영춘이라면 충분히 재담소리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속풀이 난에서 소개한 적도 있거니와 정득만은 일제강점기 말 경서도 소리꾼들의 단체인 <가무 연구회>의 제일 젊은 소리꾼으로 이창배와 함께 활동했던 인물이며 산타령이 1968년,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예능 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던 명창으로 3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이창배와 함께 활동했고, 50년대 벽파가 세운 <청구고전성악학원> 소리선생으로 함께 참여하여 제자들을 양성했는데 백영춘은 그 때 정득만 선생에게 경서도소리의 다양한 장르를 배웠던 것이다.
정득만은 80년대 초반 벽파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경서도 소리의 중흥을 위해 벽파와 함께 애쓴 명창으로 숨이 길고 청이 높아서 여자들과 함께 불러도 충분할 정도였으며 사설지름시조, 긴잡가 가운데 가장 어렵다고 하는 적벽가를 비롯해 유산가, 제비가, 소춘향가, 그리고 민요 가운데는 노랫가락이나 금강산타령, 풍등가 등을 잘 불렀다.
그의 큰 제자들은 선생의 기교 중에서 목을 조이며 떨어주는 창법의 하나인 <조르는 목>은 누가 흉내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고 말하고 있으며 소리의 강약이 분명해서 맛깔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던 명창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정득만은 경서도 지방의 선소리, 좌창, 민요 등을 섭렵한 명창이었지만, 또 다른 비장의 무기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1920년대 재담으로 유명했던 박춘재의 사랑방에 드나들며 익혀두었던 <장대장타령>과 같은 재담소리인 것이다. 완판을 제대로 배운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발표무대는 열 정도가 아닌 것이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부분 부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정득만은 재담소리가 전승자 없이 잊혀 가고 있는 점에 대해서 늘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정득만은 평소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생각을 백영춘을 불러 어렵사리 털어놓기 시작했다. “박춘재 선생이 잘 하시던 재담소리로 ‘장대장타령’이라는 게 있는데, 지금은 이 재담소리를 부르는 사람이 없어 끊어지게 생겼다. 사정이 이러하니 영춘이, 네가 목도 좋고 학습능력이 좋고 하니 이 기회에 맥을 잇는다는 각오로 한번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 만일 네가 이를 복원하여 재담소리를 이어가겠다고 하면 내가 그 재담소리 일부를 알고 있어서 가르쳐 줄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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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도 않았던 재담소리에 대한 선생의 권고를 받고 백영춘은 당황스러웠다고 고백한다. 선생의 배려는 고마웠지만, 평소의 관심 분야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이미 끊어져 버린 소리를 이제부터 배워서 되찾고 복원하는 작업이 만만치 않게 생각되었기에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득만의 권고가 되새겨지고 그럴 때마다 벽파가 정리한 <장대장타령>이라는 재담소리의 사설을 읽어 보게 되면서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를 소리극으로 재현한다면 현대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관점에서 그는 본격적인 고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재담소리에 등장하는 ‘허봉사’의 소리며 대사 등 그 역할에 대해서 점차 호감이 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정득만 선생을 찾아가 재담소리를 배우기로 결심한다. 선생이 소리 한바탕을 완전하게 꿰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전체적인 줄거리를 처음부터 완벽하게 배우지는 못했어도 부분, 부분 토막소리는 가능했다. 백영춘이 정득만으로부터 집중적으로 배웠다고 하는 대목은 앞부분인 ‘만포첨사’와 장대장의 애첩이 과거 무당이었다는 사실을 허봉사가 알게 되어 이 사실을 장대장에게 이른다고 겁을 주며 놀려대는 ‘이를 테야’ 대목이었다.
재담소리를 배우는 과정에 벽파선생은 박춘재와 관련된 자료를 제공해 주면서 이러한 재담소리들의 음조직이나 표현법이 서울 경기지방의 스타일로 불러왔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백영춘은 장대장타령을 열심히 배웠다.
맥이 끊긴 소리를 다시 찾아 재현한다는 작업은 보통의 일이 아니다. 재현작업을 위해 재담과 관련된 옛 기록이나 고음반을 뒤지는가 하면, 재담에 관여했던 실기인들을 찾아가 증언을 듣고 채록하기도 하고, 나이 많은 원로 소리꾼들을 찾아가 재담소리의 일부를 녹음하고 직접 배우는 일을 열심히 하며 복원작업을 시도했다. 이렇게 해서 재담소리극 ‘장대장타령’은 1999년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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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한 범 / 단국대 명예교수, 한국전통음악학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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