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레빗) 3289. 편견 없는 역사 기록을 써내려 한 《연려실기술》

튼씩이 2016. 5. 17. 09:01

날마다 쓰는 한국문화 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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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9(2016). 5. 17



건국대학교 역사학과 신병주 교수는 “역사학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것이 있다. 자신이 살아온 한 시대의 역사를 객관적이면서 실증적으로 정리하여 후세에 길이 읽힐 역사서를 저술하는 작업이다. 조선시대에 이러한 원칙을 가장 충실히 수행했던 인물은 누구일까? 필자는 주저 없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지은이 이긍익(李肯翊)을 손꼽고 싶다.”라고 말합니다.

조선시대 역사서는 크게 기전체, 편년체, 기사본말체의 세 가지로 나뉩니다. 먼저 기전체(紀傳體)는 임금의 행적을 주로 기록한 본기(本紀), 인물들의 행적을 정리한 열전(列傳), 본기나 열전에 담을 수 없는 항목을 분류하여 정리한 지(志)로 구성됩니다. 또 편년체(編年體)는 연대순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이지요. 그리고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는 역사를 시대순으로 구성하되, 시대별 주요 사건에 대해 원인과 결과를 밝혀 적는 방식입니다. 이 기사본말체를 대표하는 조선시대 역사서에는 바로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을 꼽고 있습니다.

특히 이 《연려실기술》이 주목을 받는 것은 당파적 편견을 배제하고 가급적 공정한 역사의식을 토대로 당시의 역사상을 파악하려 했으며, 실증을 통한 역사의 객관화를 지향한다는 것이지요. 또 이 책은 원집, 속집, 별집의 세 꼭지로 되어있는데 이 가운데 별집(別集)을 보면 전례(典禮)ㆍ문예ㆍ천문지리ㆍ변어(대외관계)와 역대 고전 등에 관한 것들을 정리하고 발자취를 기록하며 출처를 밝힌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별집은 단군조선 이래 우리 문화사를 정리한 것으로, 조선시대의 문화가 이전의 문화로부터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설명하려 한 귀중한 역사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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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악속풀이 263>

하늘이 내 눈은 가져가도 소리는 못 가져간다



지난주는 <장대장타령>을 복원, 재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되었던 것으로는 박춘재의 음반, 원로들의 증언이나 고증, 실기인들의 시범창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지난주 이야기는 재담소리극 공연에서 허 봉사역을 맡은 백영춘의 소리나 춤, 연기력에 일반 청중들은 감탄했다는 이야기, 판소리를 기반으로 하는 창극(唱劇)은 100여년 되지만, 재담소리나 배뱅이굿 등은 극(劇)과의 협업을 이루지 못하다가 1990년대 말에 시작되어 그 세가 너무도 미미한 수준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백영춘은 장대장타령의 재현에 심혈을 쏟으면서 재담과 어우러진 연희극의 일종인 발탈을 배웠고 그 이수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서울 재담소리의 전승을 위해 《서울재담소리보존회》를 만들고 경서도 창악회내에‘광무대’라는 소공연장을 개장한 뒤, 강습회와 공연을 지속해 왔다는 이야기, 백영춘의 소리가 “물먹은 소리”“소리에 물기가 묻어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건강의 적신호였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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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옛 재담소리, 장대장타령은 그 줄거리가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아 흥청망청 즐기다가 몽땅 날려 버린 장대장이란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장대장 본인의 이야기 보다는 그가 지방 관리로 나가면서 알게 되어 아내가 된 무당(巫堂)과 동네에 점을 잘 치는 허봉사가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익살스럽게 풀어나간다.

이 재담소리에서 허봉사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박춘재가 허봉사 역을 너무도 잘 해서 일반 대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하나, 지금은 백영춘이 그 역을 너무도 잘 해내고 있어서 이제는 백영춘의 전매특허처럼 되어 버렸다.

그런데 매우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허 봉사역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가 전부터 앓고 있던 당뇨병은 더욱 심해졌고, 그로 인한 합병증으로 그의 시력은 점점 나빠졌다고 한다. 눈이 침침하다고 느낀 지 1년도 안 돼 시각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고 하니 그의 병세가 얼마나 악화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담당의는 수술로 약간의 시력을 회복할 수 있으니 희망을 갖자고 권유하면서 “수술 후, 6달 쯤 푹 쉬면 완전 실명은 면하고 최대 20%정도는 회복이 가능하다. 그러나 조건은 그 기간 일체의 소리나 공연을 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 조건 앞에 백영춘은 단호하게 말한다.

“하늘이 눈은 가져가도 소리는 못 가져가. 나는 팔자가 소리꾼인데, 소리꾼에게 소리를 잠깐이라도 쉬라는 것은 죽으라는 것이여, 눈 안보여도 사는 데 지장 없으니 소리나 원 없이 하다가 죽겠다.”면서 소리를 접어야 한다는 절망적인 조건을 수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사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찌 보면 그는 무모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6달이 아니라 1년, 2년을 쉰다고 해도 수술은 받았어야 했다고 생각된다. 이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신부전증으로 일주일에 3회는 혈액투석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주위의 동료나 제자들이 선생의 건강을 걱정할라치면 “극의 완성도를 높이려면 진짜 봉사가 그 역을 맡아서 해야 하는 법”이라며 자신이 잃어가고 있는 시력은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소리에 대한 열정을 그는 제자들에게 쏟고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모를 일이다. 그의 반려자가 된 최영숙 명창만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뿐이다.

“아, 소리꾼이 입 있고, 손 있고, 발 있으면 다 있는 거여, 내가 하고 있는 허봉사 역의 장님 역할은 겉으로 보면 대수롭지 않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양반들을 꾸짖는 역할이야. 재담은 웃기더라도 요즘 개그랑은 달라. 재담은 그 자리에서 3할을 웃기고 사흘 뒤 밥 먹다가 7할을 웃게 만드는 은근함이 있단 말이어” 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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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소리보존회 김문성 사무국장의 말이다.

“2002년, 최영숙은 인생 소리길에서 백영춘을 만나게 됩니다. 최영숙이 한창 이름을 내기 시작 할 무렵에 교통사고를 당했지요. 그러나 강한 집념으로 전주대사습놀이 민요부에서 장원을 하는 등, 명창의 반열에 오르며 재기에 성공합니다. 그 뒤 학원도 내고, 활발하게 공연활동을 하면서 자리를 잡아갈 무렵, 그녀에게 ‘회심곡’을 가르쳐 주었던 백영춘 명창을 찾게 되지요. 백영춘의 소리길이며 많은 자료의 온전한 보존을 위해 백영춘을 설득해서 그녀의 학원으로 모셔왔고, 그 이후 그 소리들을 연마하고 또 무대에 올리기 시작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무대에 올리는 공연마다 매진이고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최영숙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시력 안 좋은 걸 왜 몰랐겠어요. 제가 정말 사랑하고 존경한 것은 백 선생님의 육신이 아니라 소리에 대한 열정, 그리고 늘 인자하신 성품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선생은 건강이 상당히 안 좋은 상황이었고, 옆에서 수발을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어요. 저는 뭐 고민할거도 없이 이게 내 운명이고 팔잔가 보다고 생각하고 기꺼이 백 선생님을 모시기로 마음먹었어요.”

백영춘의 눈이 되고 사지가 되어 평생토록 그분을 보필하며 살겠다는 결심 아래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말이다.

“요즘은 보이질 않으니 아침저녁이 잘 구분 안 돼요. 일어나면 그때가 아침이고 그때부터 소리를 하게 되지요. 왜 편하게 살고 싶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내게 소리는 밥만큼 훌륭한 영양분이기에 목구멍이 막혀 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그때나 한번 생각해 봐야지요. 의사들은 소리를 하면 죽는다고 하는데 실제로 소리를 한 뒤 혈당과 혈압은 오히려 떨어졌어요. 기분이 얼마나 편해지는지 모릅니다.”

“하늘이 내 눈은 가져가도 소리는 못 가져가요.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데 그거마저 가져가면 하늘이 그 원성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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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한 범 / 단국대 명예교수, 한국전통음악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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