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전 오늘(1월 31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李東輝) 선생이 심한 독감으로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선생은 젊었을 때 아버지의 주선으로 함남 단천군수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통인(通引)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통인 시절 군수가 자신의 생일에 어린 기생에게 온갖 추행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동헌으로 뛰어들어 화로를 군수의 머리에 뒤엎었지요.
사건 직후 선생은 서울로 도피하여 사관양성소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 육군참위에 임관되었는데, 선생의 청렴강직과 충성심을 높이 산 광무황제에 의해 삼남검사관(三南檢査官)으로 임명된 뒤 지방진위대의 부패장교와 지방관리들을 엄격하게 처벌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이후 선생은 지도자로서 여러 구국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구속되거나 유배되기도 했는데 유배에서 해제된 직후 북간도로 탈출합니다.
이후 북간도에서 치열한 독립운동을 하던 선생은 1919년 11월 3일 개조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직에 취임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있던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에서 모으던 애국금 등 미주지역의 모든 독립운동자금을 독점하였는데 그 때문에 미주동포로부터 자금이 끊어지면서 상해임시정부는 재정적 어려움과 침체상태에 빠지게 되었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은 1920년 중반 6명의 임시정부 차장들과 함께 대통령 이승만 불신임운동을 펼쳤지만 안창호,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등과 갈등이 커져 마침내 1921년 1월 24일 상해임시정부를 탈퇴하고 말았습니다.
그 뒤 선생은 공산주의운동의 선구적 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 근본적인 사상에는 무엇보다 반일민족독립이 바탕을 이룬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선생의 공산주의운동은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숙원을 이루기 위한 한 방편으로서 소련 정부와 제휴한 민족주의적 혁명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사진이 있는 이야기 >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얼레빗 4267호) 마당을 쓸면 황금이 나오는 입춘 (0) | 2020.02.04 |
---|---|
(얼레빗 4266호) 내일은 입춘, 적선공덕행을 해볼까? (0) | 2020.02.03 |
(얼레빗 4264호) 선조의 얼, 고지도를 필사한 ‘최현길 선생’ (0) | 2020.01.30 |
(얼레빗 4263호) 쉽고 재미난 《경복궁 중건 천일의 기록》 (0) | 2020.01.29 |
(얼레빗 4262호) 한국과 전 세계 가위의 역사, ‘진안가위박물관' (0) | 2020.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