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말기 집집마다 초상사진을 걸어둔 까닭은?
“짐(朕)이 머리를 깎아 신하와 백성들에게 우선하니 너희들 대중은 짐의 뜻을 잘 새겨서 만국(萬國)과 대등하게 서는 대업을 이룩하게 하라.” - 『고종실록』 32년 11월 15일
고종 32년(1895년) 11월 15일에 고종이 단발령을 내리자 온 나라가 들끓습니다. 조정에서는 단발령을 내리는 까닭으로 단발을 함으로써 만국과 동등해질 수 있고 위생적이며 활동적임을 내세웁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곧 ‘몸과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를 금과옥조로 삼아서 머리카락 자르는 것을 불효로 보았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지요.
그래서 백성들은 단발령을 완강히 거부했고, 이에 순검들이 길거리에서 상투를 마구 자르거나 민가에 들어가 강제로 머리를 깎기도 했지요. 이에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심지어 남편이 머리 자르고 양복을 입고 집에 들어오자 자결까지 한 16세의 어린 신부도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단발령을 거부할 수 없자,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자르는 대신 머리 자르기 전 초상사진을 찍거나 초상화를 그려 안방 벽이나 출입문 위에 소중히 걸어놓는 것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초상사진을 찍는 것은 길었던 머리털을 사진으로 찍어 남겨두려는 뜻 외에 다른 뜻도 있었습니다. 머리털을 자르면 양반과 백성의 구별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이 상투를 튼 양반이었음을 증명하려 했던 일부 양반의 몸부림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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