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아름다운 우리문화 산책(김영조)

큰비로 백성이 죽어가는 데 불구경하듯 했던 현령

튼씩이 2021. 12. 21. 08:00

큰비로 백성이 죽어가는 데 불구경하듯 했던 현령

 

 

박회(朴回)에게 전지하기를, “내가 처음에 조운선(漕運船) 70여 척이 바람을 만나서 표류(漂流) 침몰(沈沒)하였다는 것을 듣고, 내 마음에 그 배에 탔던 천여 명의 사람이 다 빠져 죽었으리라 여겨, 아침저녁으로 진념(軫念)하였었다. 이제 너의 글을 보니 내 마음이 기쁘다. 네가 빨리 계달하여 나의 진념하던 심회(心懷)를 풀리게 하였음을 아름답게 여겨 특히 옷 한 벌을 하사하니, 너는 이를 영수할지어다.”

 

 

세종실록25(1443) 68일 기록입니다. 여기서 조운선(漕運船)이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때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물과 생활용품을 한양으로 운반하는 데 사용했던 배를 말합니다.

 

앞서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에는 해상왕 장보고가 뛰어난 배를 만들어 아시아의 해상활동을 장악한 역사가 있습니다만 해상에서의 선박 침몰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승인(李承仁)은 안변 현령(縣令)으로 재임하던 시절, 큰비로 냇물이 불어 민가 60채가 떠내려가고 노약자와 여성 20여 명이 물에 빠져 죽는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제사를 핑계로 나와 보지도 않고 뒤늦게 나와서는 먼 산 불구경하듯 했다고 명종실록2(1547) 910일 기사에서 꾸짖고 있습니다.

 

 

서로 바라다볼 정도의 지점에 물러앉아서 마치 다른 나라 사람을 보듯 하였으며, 침몰(沈沒)되고 익사할 위험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끝내 구원할 뜻이 없었으니, 이는 군명(軍命)을 의식하지 않은 것으로 사체(事體)가 매몰된 것입니다.”

 

 

현령의 무책임한 태도에 명종은 그의 죄를 낱낱이 캐물어 응당한 처벌을 하라는 명을 내립니다. 나라의 녹을 받는 사람들이 이 지경이면 무고한 백성의 목숨은 늘 위태로울 수밖에 없지요. 지난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고가 났을 때도 선장을 비롯한 여러 관계자가 이승인 같은 태도를 취해 304명의 희생자가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