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오르는 “오자등과”

튼씩이 2015. 11. 24. 13:55

날마다 쓰는 한국문화 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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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8(2015). 11. 24.



“검참판(檢參判) 안경(安璟)의 아들 안관후(安寬厚)·안인후(安仁厚)·안중후(安重厚)·안근후(安謹厚)·안돈후(安敦厚)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올랐으니, 청컨대 예(例)에 의하여 어미에게 쌀을 내려 주고, 아비에게 치제(致祭, 나라에서 대신이나 나라를 위하여 죽은 사람에게 제문-祭文과 제물-祭物을 갖추어 지내주는 제사)하소서.”라고 예조(禮曹)에서 아뢰니 그대로 따랐다.

위는 《세조실록》 6년(1460) 윤11월 29일(신미)의 기록입니다. 아들 다섯을 두는 것은 특별한 사람만 누리는 복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 하는 일은 극소수의 사람만이 누리는 정말 대단한 일이었지요. 조선시대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오르면 부모에게 해마다 쌀을 내리고, 돌아가신 부모는 추증(追贈, 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 주던 일)하고 치제한다.”는 조항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오르는 “오자등과(五子登科)”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큰 복 가운데 하나였지요. 따라서 “오자등과(五子登科)”라고 새긴 공예품은 인기가 있었습니다. 특히 “오자등과(五子登科)” 글씨가 새겨진 별전(別錢, 장식과 상징적인 의미로 만든 화폐)도 있었지요. 이런 공예품을 갖는다는 것은 꼭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오른다보다는 많은 자식을 두고 그 자식들이 과거에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부모의 한결같은 마음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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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악속풀이 238>

풍물인생, 지운하 명인은 정통파 남사당의 후예



지난주 속풀이에서는 서울의 권번으로 <한성권번>, <조선권번>, <종로권번>이 당국에 의해 합병되면서 <삼화권번>으로 존재하다가 2차 세계대전이 치열해 질 무렵, 폐쇄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가무연구회 회원들은 사설교습소를 차려 일반인들을 지도했는데, 관청의 허가가 있는 권번 이외에는 예기(藝妓)의 허가장을 받을 수 없었기에 모두 권번 문을 두드려 왔다는 이야기, 당시 이름난 사설학원이나 교습소의 운영자로는 마포의 박춘재와 김경호, 신촌의 김창연, 현저동의 박윤병 등이 있었다는 이야기, 특히 지금의 성동구 신당동이나 왕십리 부근이 그 중심지로, 이명길은 신당동에서 100여명의 제자를 가르쳤고, 엄태영이나 오성렬, 예능보유자였던 김태봉 등은 상왕십리에서, 탁복만은 하왕십리에서 사설 교습소를 운영해 왔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그밖에도 김태운, 이명산, 고전무용의 이칠성, 효창동의 최석조, 이태원의 성수근, 내수동의 이만흥, 사직동의 김종수, 돈암동의 김두식, 예지동의 오봉식, 광희동의 이현재, 와룡동의 강흥태와 강흥식 형제, 익선동의 홍병호, 그리고 당시 제일 젊은 나이로 입회한 정득만과 이창배 등도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동 가무연구회가 일제 말기에 경서도 소리를 힘들게 지켜왔다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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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잠시 바꾸어 이번 주에는 인천이 낳은 국악계의 풍물 명인, 지운하 선생이 그의 풍물인생 60주년을 기념하는 잔치를 이 달 28일 토요일, 오후 5시 부평아트센터 해누리극장에서 갖는다고 해서 그 기념 공연 이야기를 먼저 한 다음, 가무연구회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다.

지 명인은 남사당 출신의 유랑 예인으로 60년 외길 인생을 걸어 왔다. 사람이 태어나 한 길로 20~30년 가기도 어려운 일이거늘, 60년을 외길 인생으로 살았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흔한 일이 아니어서 경외(敬畏)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나와 지운하 명인이 가깝게 인연을 맺은 것은 20여 년 전, 어느 여름의 중국 연변대학에서 만난 이후가 되고 있다. 내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전통음악학회>와 중국의 <연변예술대학>이 해마다 공동으로 개최하는 학술 및 실연교류회장에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지 명인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당시 연변지방과 할빈, 흑룡강성 등지의 조선족 학생들을 상대로 풍물가락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멀리 할빈에서 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밤새 달려왔다고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우리말이 서투른 2세나 3세들이 많았다. 이들에게 우리말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모국어는 동포사회에서 통하지 않게 될 것이 분명했다.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이 그 넓은 외국땅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국어와 함께 우리의 소리나 장고, 꽹과리 가락이 절대적인 힘이 된다는 사실을 나와 지운하는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정신을 심고, 얼을 심고, 자긍심을 갖도록 도와주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목적 아래 나라밖에서의 봉사 활동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이고, 더욱이 이러한 활동이 대가를 바라고 하는 활동이 아니었기에 우리는 더욱 더 친해 질 수 있었고, 그 이후 더욱 가깝게 지내게 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소년 지운하는 고향땅 인천에서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이 치는 풍물소리를 자주 들으며 자랐다. 인천소재 <숭의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풍물굿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하니 60년 세월이 분명하다. 그가 12세 때, 당시의 숭의풍물단은 지역 대표로 뽑혔고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영예의 대통령상을 받았는데, 그가 12발 상모를 너무도 잘 돌려서 수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기실 이 사건으로 인해 지운하는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학교에서는 박산옥(朴山玉) 명인에게 그리고 이후에는 사물놀이로 유명한 김덕수 명인의 아버지 김문학 문하에서 배웠으며 그 뒤로는 사당패의 풍물을 단계별로 익히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땅재주나 접시돌리기, 인형극 등 남사당의 각종 예능을 두루 익히게 되어 이 분야의 정상급 명인으로 자리를 굳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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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당(男寺黨)>패란 조선 후기, 남자들로만 구성되어 전국을 무대로 유랑생활을 하던 예인들의 집단이다. 다양한 놀이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민중 속에서 민중들과 함께 애환을 함께 해 온 집단이다. 지운하는 이곳에서 조직의 하위그룹인 풋내기나 초보자를 뜻하는 <삐리>생활부터 시작을 했다. 삐리로서의 생활이란 스승을 봉양해야 하고, 놀이를 통해서 끼니를 연명해야 하기에 그 학습 자체가 한과 설움의 세월이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는 선생의 말씀을 곧 생명으로 알고 따랐다고 하면서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어느 사회, 어느 조직이고 간에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의 기본질서가 무너지면 그 조직은 경쟁에서 낙오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생활의 기본 질서를 남사당에서 착실하게 배운 그가 이제 남은 인생을 고향땅 인천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있다. 자신을 위하고 고향땅 주민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부디 건강과 행운이 그와 함께 해서 성공적인 삶이되기를 기원한다.

참고로 이번에 그가 펼치는 제1부‘예인의 길’에는 남기문의 비나리, 유지숙의 서도소리, 최경만의 피리 시나위, 김덕수ㆍ지운하ㆍ진명환ㆍ최종석 사물놀이, 진쇠 등의 걸립굿, 지운하의 소고놀이와 열두발 상모, 최종실의 소고춤, 원장현의 태평소 시나위, 지운하의 쇠놀음, 강향란의 징춤, 김수연의 판소리 등으로 짜여지고, ‘제2부 유랑의 길’에서는 권원태의 줄타기, 남사당놀이 인천시지회의 풍물판굿, 평택농악보존회의 공마당 순으로 펼쳐진다고 한다.

또한 이 날, 공연에 앞서 60년 예인생활을 한 권 책으로 묶어 출판하는 《지운하의 유랑 인생 60년》의 출판기념회도 갖는다. 남사당을 위해 평생을 다한 한 예인의 실감나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과 함께 재미를 더해 주기에 충분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부디 고향땅 인천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있는 예인의 생활이 남을 위하고 지역을 위하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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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한 범 / 단국대 명예교수, 한국전통음악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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