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민속박물관 33

(얼레빗 4578호) 세종이 구조를 제안하여 만든 ‘일성정시의’

“처음에 임금이 주야 측후기(晝夜測候器, 밤낮으로 기상의 상태를 알기 위해 천문의 이동이나 천기의 변화를 관측하는 기기)를 만들기를 명하여 이름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 하였는데, 이를 완성하였다고 보고하였다. 모두 네 벌인데, 하나는 궁궐 안에 둔 것으로 구름과 용으로 장식하였으며, 나머지 셋은 발이 있어 바퀴자루[輪柄]를 받고 기둥을 세워 정극환(定極環, 별의 운동을 관측하는 기구)을 받들게 하였다. 하나는 서운관(書雲觀)에 주어 점후(占候, 구름의 모양ㆍ빛ㆍ움직임 등을 보고 길흉을 보는 점)에 쓰게 하고, 둘은 함길ㆍ평안 두 도의 절제사 영에 나눠주어 경비하는 일에 쓰게 하였다.” ▲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복원품, 53×164.5cm, 국립민속박물관 이는 《세종실록》 19년(1437년) ..

(얼레빗 4547호) 양반과 평민이 함께 싣던 짚신

짚신은 볏짚으로 삼은 신발로 초혜(草鞋)라고도 하며, 재료에 따라 왕골신[菅履]ㆍ청올치신[葛履]ㆍ부들신[香蒲履]도 있는데 특히 짚신과 같은 모양이지만 삼[麻]이나 노끈으로 만든 것을 ‘미투리’ 또는 삼신[麻履]이라 하며 이는 짚신보다 훨씬 정교하지요. 짚신의 역사는 약 2천여 년 전 마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중국 송나라 마단림(馬端臨)은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 “마한은 초리(草履)를 신는다.”라고 했는데 이 초리가 바로 짚신입니다. ▲ 짚신, 국립민속박물관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그의 책 《성호사설》에서 “왕골신과 짚신은 가난한 사람이 늘 신는 것인데 옛사람은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선비들은 삼으로 삼은 미투리조차 부끄럽게 여기고 있으니, 하물며 짚신이야 말해 무엇 하겠..

(얼레빗 4513호) 중국의 제후국이지만 독자적으로 만든 역서

서울 국립민속박물관에는 보물 제1319호 이 있습니다. 은 ‘대통력법(大統曆法)에 따라 만든 경진년(庚辰年)의 역서’라는 것으로 조선 선조 12년인 기묘년(己卯年, 1579년)에 활자본으로 펴내 이듬해인 경진년(庚辰年, 1580년)에 쓰인 역서(曆書)이며, 조선의 역서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 보물 제1319호 , 1579년, 국립민속박물관 지금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의 여러 국학기관과 박물관, 도서관들에는 조선의 역서들이 수백 책이 넘게 소장되어 있는데, 이들 가운데서 1580년 이전에 펴낸 역서는 이 경진년대통력이 유일하지요. 이 대통력의 크기는 길이 39.8㎝, 너비 21.7㎝로 앞뒤의 표지를 빼고 모두 15장 30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선은 원래 중국의 제..

(얼레빗 4438호) 우리말 사랑한다면 추석 아니라 ’한가위‘

우리 겨레의 명절 가운데 가장 큰 ’한가위‘가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이때만 되면 연례행사처럼 ’한가위‘냐 ’추석‘이냐를 애타게 외칩니다. 사실 우리 겨레는 신라 이후 오랫동안 ’한가위‘‘를 써왔지만 요즘 어찌 된 일인지 ’추석‘이란 말이 대세가 되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추석(秋夕)’은 5세기 때 송나라 학자 배인의 《사기집해(史記集解)》에 나온 “추석월(秋夕月)”이란 말에서 유래합니다. 여기서 “추석월”의 뜻은 천자(天子)가 ‘가을 저녁에 달에게 제사를 드린다.’라는 뜻이었으니 우리의 명절과 맞지 않는 말입니다. 더구나 중국 사람들조차 이 '추석'이란 말은 거의 쓰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 우리는 '추석'이 아니라 '한가위'라고 부르자.(그림 이무성 작가) '한가위'라는 말은 ‘크다’는..

(얼레빗 4422호) 어머니가 머리를 빗을 때 뚜껑을 열던 빗접

단아한 모습의 조선 사대부가 여성은 아침마다 얼레빗과 참빗으로 머리를 단정하게 빗었습니다. 이때 머리를 빗는 도구들은 빗접이란 도구에 담아 두었지요. 빗접은 모양에 따라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빗접을 만드는 재료에 따라 창호지 따위를 여러 겹 붙여 기름에 절여서 만든 소첩(梳貼)과 나무로 짜서 만든 소갑(梳匣)이 있습니다. 또 빗접 자체가 고비 겸용으로 만들져 벽에 걸어둔 것을 빗접고비라 합니다. 빗접은 쓰임새에 따라 크고 작은 서랍이 여러 개 달립니다. ▲ 조선시대 머리 손질하는 도구들을 넣어두던 "나전빗접", 국립민속박물관 또 꾸민 방법으로 나누면 먹감나무ㆍ느티나무ㆍ오동나무 따위로 만들어 나뭇결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 있는가 하면 자개를 붙여 화려하게 꾸민 “나전빗접”, 쇠뿔로 장식한 “화각빗접”이..

(얼레빗 4408호) 김준근 그림으로 보는 100년 전 풍속

100~200년 전 우리 겨레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당시는 카메라가 발달하지 못한 때여서 전하는 그림으로 겨우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긍재 김득신(金得臣) 등의 풍속화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그림들입니다. 그런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화가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은 우리에게 1,500여 점이 넘는 풍속화를 남겨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100년 전 사람들의 풍속을 잘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지난 5월 20일부터 오는 10월 5일까지 특별전이 열리고 있지요. 그리고 어제 8월 18일에는 이 특별전 연계 비대면 학술대회를 공식 유튜브 채널(www.youtube.com/tnfmk)로 연 바 있습니다. 이 학술대회에서는 1976년..

(얼레빗 4397호) 소통하고, 서로의 삶을 이해하는 자리 평상

“좌탑은 네 모서리에 장식이 없고, 큰 자리를 얹어놓는다. 관사 안에 지나다니는 길 사이에 두고, 관리들이 쉴 때 사용하였다. 와탑은 3면으로 난간이 세워져 있으며, 비단 보료가 깔리고 큰 자리가 놓여 있다. 단지 임금과 높은 벼슬아치와 관련한 의식이 있거나,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만 사용한다.” 중국 송(宋)나라 관리로 고려 인종(仁宗) 원년(1123)에 사신으로 온 서긍(徐兢)이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이렇게 좌탑(坐榻)과 와탑(臥榻) 곧 평상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 자개평상(平床), 98.5×98.5×47, 국립민속박물관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산중에 열 가지 경취(景趣)를 말했는데, 그 가운데는 평상 위에서 글 읽는 것도 들어 있습니다. 조선 후기 선비 화가..

(얼레빗 4389호) 밤에 방을 밝혔던 조명도구 등잔

전기를 쓰기 전까지 우리 겨레가 밤을 밝혔던 조명 도구들 가운데 으뜸은 등잔입니다. 등잔은 기름을 연료로 하여 불을 켤 수 있도록 만든 그릇을 말하지요. 그 재료에 따라 목제ㆍ토제ㆍ백자ㆍ사기ㆍ놋쇠ㆍ철제ㆍ대리석 따위의 등잔이 있습니다. 오래된 유물로는 신라의 토기로 된 다등식와등(多燈式瓦燈)이 있고,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자등잔이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옥등잔(대리석등잔)이 있었습니다. ▲ 등잔과 등잔대, 국립민속박물관 등잔에는 한지나 솜ㆍ베실 등으로 심지를 만들어 기름이 배어들게 하여 불을 켭니다. 기름으로는 참기름ㆍ콩기름ㆍ아주까리기름 등의 식물성과 동물성으로 물고기에서 짜낸 기름 등을 썼지요. 1876년경에 일본으로부터 석유가 수입되면서, 심지꽂이가 따로 붙은 사기등잔이 대량으로 수입, 보급되었습니..

(얼레빗 4267호) 마당을 쓸면 황금이 나오는 입춘

겨울 속에서 봄을 보려면 신도 경건하게 무릎 꿇어야 하리라 내 사는 은현리서 제일 먼저 피는 꽃 대한과 입춘 사이 봄까치꽃 피어 가난한 시인은 무릎 꿇고 꽃을 영접한다 오늘은 24절기가 시작되고 봄을 맞이하는 입춘(立春)입니다. 입춘 무렵의 대표적인 세시풍속으로는 봄이 온 것을 ..

(얼레빗 4243호) 올해는 쥐의 해, 관직 붙은 서생원

“488년 정월 대보름에 소지왕이 천천정(天泉亭)으로 행차하였다가 쥐가 사람소리로 까마귀를 따라가라 하여 무사에게 뒤쫓게 하였다. 무사가 까마귀를 쫓아 남쪽 피촌(避村)에 이르자 까마귀는 사라지고 연못에서 한 노인이 나와 봉투를 올렸다. 그 겉봉에는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