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민속박물관 33

제주도 사람들의 강인함과 슬기로움을 보여주는 쌍따비

제주도 사람들의 강인함과 슬기로움을 보여주는 쌍따비 지난 2010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쌍따비를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확인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국립광주박물관은 “이 따비는 대전 출토품으로 전하는 국보 유물인 농경문 청동기에 보이는 쌍따비와 같고, 근현대에 사용하던 따비와도 상당히 유사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따비’는 삽고 같은 원리로 땅을 일구는 농기구의 하나입니다. 다만 삽과 다른 점은 날이 넓적한 삽처럼 흙을 베면서 파거나, 파낸 흙을 다른 곳으로 퍼 옮길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따비는 날이 하나인 ‘외따비’와 날이 둘인 ‘쌍따비’가 있습니다. 쌍따비는 크기가 보통 사람의 키보다 약간 길며, 무게도 외따비의 두 배 정도가 됩니다. 따라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이 쌍따비를 다루기가 벅찰 수도 있지요..

민화에 잉어와 죽순이 등장하는 까닭은?

민화에 잉어와 죽순이 등장하는 까닭은? 호랑이를 우스꽝스럽게 그린, 민중들의 생각이 그대로 반영된 가장 한국적인 그림이라고 하는 ‘민화民畵’를 아십니까? 보통 민화는 비전문적인 화가나 일반 대중의 치졸한 작품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도화서圖畫署의 화원畫員 같은 전문 화가가 그린 뛰어난 그림도 있습니다. 민화에는 나쁜 귀신을 쫓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기를 바라는 대중의 의식과 삶에 얽힌 그림, 집 안팎을 꾸미기 위한 그림 등이 있지요. 그런데 민화 가운데는 글씨를 이용해 그린 도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윤리도덕에 관련된 글씨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에 주로 쓰인 글자는 효孝, 제悌, 충忠, 신信, 예禮, 의義, 염廉, 치恥 이렇게 여덟 글자입니다. 그래서 는 주로 사랑방이나 글을 배우..

단소와의 병조가 아름다운 국악기 양금

국악기 가운데 양금(洋琴)은 18세기 영조 때 유럽에서 청나라를 통해 들어 온 악기입니다. ‘구라철사금(歐邏鐵絲琴)’ 또는 ‘구라철현금(歐邏鐵絃琴)’이라고도 하며, 주로 민간의 정악 연주에 쓰였습니다. 사다리꼴 상자 위에 2개의 긴 괘를 세로로 질러 고정시키고, 괘 위에 14벌의 금속 줄을 가로로 얹은 다음, 대나무를 깎아 만든 가는 채로 줄을 쳐서 맑은 금속성의 소리를 내지요. 몸통은 오동나무판으로 만들며, 줄은 주석과 철의 합금으로 만듭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양금에 대한 기록이 나오며, 이규경의 『구라철사금자보(歐邏鐵絲琴字譜)』에도 양금에 대한 소개가 실려 있습니다. 풍류 악기인 양금은 18세기부터 줄풍류와 가곡, 시조 따위의 노래 반주에 쓰였고, 궁중무용인 ‘학연화대처용무합설’에서..

이도령이 춘향이를 그리면서 읽은 어뚱한 천자문

오메불망 우리 사랑 규중심처 감출 ‘장’, 부용작약의 세우 중에 왕안옥태 부를 ‘윤’, 저러한 고운태도 일생 보아도 남을 ‘여’, 이 몸이 훨훨 날아 천사만사 이룰 ‘성’, 이리저리 노니다가 부지세월 해 ‘세’, 조강지처는 박대 못 허느니 대전통편의 법중 ‘율’, 춘향과 날과 단둘이 앉어 법중 ‘여’, 자로 놀아보자. 김세종제 사설 가운데 ‘천자 뒤풀이’ 대목입니다. 원래 『천자문(千字文)』은 중국 양(梁)나라 때 주흥사(周興嗣)가 1구 4자로 250구, 모두 1,000자로 지은 책이지요. 하룻밤 사이에 이 글을 만들고 머리가 허옇게 세었다고 하여 ‘백수문(白首文)’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한자(漢字)를 배우는 입문서로 널리 쓰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천자문이 나왔는데 특히 석봉 한호..

양반을 거침없이 비꼬는 말뚝이

“이놈 말뚝아! 이놈 말뚝아! 이놈 말뚝아!” “예에에. 이 제미를 붙을 양반인지 좆반인지 허리 꺾어 절반인지 개다리 소반인지 꾸레 이전에 백반인지 말뚝아 꼴뚝아 밭 가운데 쇠뚝아 오뉴월에 말뚝아 잔대뚝에 메뚝아 부러진 다리 절뚝아 호도엿 장사 오는데 할애비 찾듯 왜 이리 찾소?” 한국 전통탈춤의 하나인 봉산탈춤 제6과장 에서 양반이 말뚝이를 찾자 말뚝이가 양반들을 조롱하는 사설입니다. 옛날 양반이나 벼슬아치들이 타는 말을 다루는 사람을 말구종이라 했고, 이들이 머리에 쓰는 것을 말뚝벙거지라 했습니다. 말구종이 말뚝벙거지를 썼다 해서 ‘말뚝이’라고 부른 듯합니다. 한국 탈춤에서 가장 중요한 배역을 말하라면 당연히 말뚝이입니다. 말뚝이는 소외받던 백성의 대변자로 나서서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대사로 양반을 거..

(얼레빗 4667호) 첫 근대식 인쇄소 박문국(博文局) 설립

1883년 오늘(월 17일) 한국 첫 근대식 인쇄소 ‘박문국(博文局)’이 설립되었습니다. 특히 박문국은 신문ㆍ잡지의 편찬과 인쇄를 맡아보던 출판기관으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산하기관인 동문학의 신문발행 업무를 담당하려고 설치한 것입니다. 초대총재는 이조판서, 한성부판윤을 지낸 민영목으로 한성부 남부 훈도방(薰陶坊) 저동의 영희전(永禧殿) 자리에 있었으며 1883년 10월 우리나라 첫 근대 신문 를 발간했습니다. ▲ 한성순보 제2호,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고종실록》에 "박문국을 설치한 지 몇 해가 되었는데 빚을 갚으려고 시골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폐단을 끼칠 뿐만 아니라 실효도 없으니 해당부서를 교섭아문(交涉衙門)에 넘겨 교섭아문으로 하여금 적당히 일을 처리하게 하라"는 기록이 ..

(얼레빗 4651호) 돈 받고 대신 매를 맞는 일, 매품팔이

지난 2월 뉴스엔 “대한체육회가 이른바 '맷값 폭행'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최철원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 당선인(마이트앤메인 대표)의 인준을 최종 거부했다.”라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흥보전에는 “이때 본읍 김좌수가 흥부를 불러 하는 말이, ‘돈 삼십 냥을 줄 것이니 내대신 감영에 가서 매를 맞고 오라.’ 흥부 생각하되, ‘삼십 냥을 받아 열냥 어치 양식 사고 닷냥 어치 반찬 사고 닷냥 어치 나무 사고 열 냥이 남거든 매 맞고 와서 몸조섭하리라.’“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매품팔이 대목이죠. 실제 조선시대에 이런 매품팔이가 있었을까요? 《승정원일기》에 “돈을 받고 대신 곤장을 맞는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매품팔이가 있었던 게 분명하지요. 특히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장유승 책임연구원이..

(얼레빗 4625호) 국가무형문화재 새 종목된 ‘막걸리 빚기’

문화재청은 지난 15일 ‘막걸리 빚기’를 새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습니다. 이번 지정 대상은 막걸리를 빚는 작업은 물론이고, 다양한 생업과 의례, 경조사 활동 등에서 나누는 전통 생활관습까지를 포괄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쌀 막걸리는 쌀을 깨끗이 씻어 고두밥을 지어 식힌 뒤, 누룩과 물을 넣고 여러 날 동안 발효시켜 체에 거르는 과정을 통해 빚지요. 막걸리의 ‘막’은 ‘바로 지금’, ‘바로 그때’와 ‘걸리’는 ‘거르다’라는 뜻으로 그 이름이 순우리말일 뿐만 아니라 이름 자체에서도 술을 만드는 방식과 그 특징이 드러나 있습니다. ▲ 막걸리(사진 제공: 국립민속박물관) 막걸리는 멥쌀, 찹쌀, 보리쌀 등 곡류로 빚기 때문에 삼국 시대 이전 농경이 이루어진 시기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막걸리는 물과 쌀..

우리 선조들의 여름나기는 어땠을까?

국립민속박물관(관장 김종대)은 상설전시관 1 를 여름의 일상을 담아 새롭게 개편하여 6월 11일(금)부터 관람객을 맞는다. 이번 개편에서는 한여름 일상을 살펴볼 수 있는 부채, 죽부인, 등등거리 등 여름나기 용품을 비롯하여 도리깨․넉가래 등 보리타작 도구, 논호미 등 김매기 관련 자료, 통발․가리 같은 천렵(川獵) 도구 등 모두 46점의 유물이 새롭게 전시된다. ▲ 선비의 여름 일상 □ 선조들의 더위 나기 용품의 재료에 담긴 과학적 원리 전시장은 선비의 아침으로 시작한다. 여름을 맞이하는 선비의 사랑방에는 ‘등등거리’와 ‘토시’ 등 다양한 더위 나기 용품을 통해서 선조들의 슬기로움을 엿볼 수 있다. 이 용품은 옷과 피부 사이에 공기층을 만들어 주고 그 사이로 바람이 통하게 하여 서늘함을 느낄 수 있도록 ..

(얼레빗 4598호) 한복 차림을 더욱 우아하게 하는 ‘노리개’

노리개는 조선 여인네들의 한복 저고리 겉고름 또는 치마허리에 차는 꾸미개(장신구)입니다. 모양이 다양하면서도 화려하고 섬세한 노리개는 궁중 사람들은 물론이고, 백성에 이르기까지 두루 즐겨 찼습니다. 몸에 차는 꾸미개는 원래 칼이나 숫돌 같은 삶에 필요한 물건을 허리에 찼던 북방 유목민들의 풍속이 전해진 것이라 하지요.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고려시대 귀족 부녀자들이 허리띠에 금방울금향낭(金香囊, 향주머니)을 찼다.”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렇게 허리띠에 달았던 꾸미개들은 고려시대 후기에 들어서면서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자 허리 대신 고름에 달게 되었지요. 노리개는 대삼작, 중삼작, 소삼작으로 나뉘는데 대삼작노리개는 궁중이나 양반가의 혼례용으로 쓰였고, 중삼작노리개는 궁중과 양반들의 일상에서, 소삼작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