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39

민족 계몽을 꿈꾼 ‘대한민보(大韓民報)’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대한제국(1897~1910) 시기는 근대의 희망과 아픔이 공존했던 시기였습니다. 침략적 제국주의가 만연하던 시대에 우리나라로 침탈해 들어오는 외세를 막아내기 위해 무력투쟁(武力鬪爭)을 비롯한 여러 자강(自强)과 계몽운동(啓蒙運動)을 각계각층에서 펼쳤으나, 끝내는 그 빛을 보지 못하고 일제강점이라는 어두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에 근대 문물이 들어오던 시기는 외세의 위협이 날로 늘어나는 때였기 때문에, 이때의 근대 문물은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방편으로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신문(新聞)’입니다. 그렇게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은 『한성순보(漢城旬報, 1883~1884)』였고, 그 후로 『한성주보(漢城週報, 1886~1888)』, 『독립신문(獨..

대한제국 황실문화의 탄생 (2)

3. 근대주권국가로서 대한제국의 국가상징물들 대한제국은 만국공법 체제 하의 근대주권국가를 지향하는 것이었으나, 황제 즉위식을 비롯한 ‘화려한 군주’와 황실가족의 탄생 모습은 외형상으로는 일단 동양적 황제국의 복장이나 의례를 추수하는 것이었다. 대한제국 황제정과 황실문화가 구래의 중화제국의 황실문화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고종이 선망했던 유럽의 근대제국의 황실문화를 추구할 것인지 그것이 1897년 10월, 어렵사리 탄생한 대한제국 황제정 앞에 놓인 선택지였다. 황제 탄신일을 만수성절(萬壽聖節), 황태자 탄신일을 천추경절(千秋慶節), 황제 즉위일을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 태조 고황제(高皇帝) 등극일을 개국기원절(開國紀元節)로 기념일로 제정하고 태극기를 게양하며 축하연을 벌일 때도 그 명칭은 중국 명나라의 ..

대한제국 황실문화의 탄생 (1)

대한제국 황실문화의 탄생 서 영 희 한국산업기술대학교 지식융합학부 교수 1. 황제국 선포의 배경 1897년 대한제국의 탄생은 중국 중심의 전통적 동아시아 국제질서 관념으로 보면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원래 제국(帝國)의 군주를 의미하는 황제라는 칭호는 많은 나라들을 복속시키는 군주가 되고 나서야 이용할 수 있는 칭호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치유신 이후 근대 일본이 이미 동아시아적 계층질서를 부인하고 ‘제국’을 칭했듯이 대한제국 또한 주권국가로서 중국(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의 의지를 제호(帝號)로써 천명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국정운영의 면모를 일신하는 차원에서 칭제를 적극 추진했다. 칭제 상소에는 전․현직 관료층을 비롯하여 지방의 유학(幼學), 관학유..

조선 국왕의 상징물 - 국왕의 상징물을 보관했던 종묘

종묘는 조선의 국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국왕의 신주는 삼년상을 지나면 바로 종묘로 모시지만, 왕비의 신주는 별도의 사당에 모셨다가 국왕이 사망한 후 함께 종묘에 모셨다. 종묘의 정전에 모셨던 국왕과 왕비의 신주는 4대가 지나면 종묘의 영녕전으로 옮겨서 모시게 된다. 현재 종묘의 정전에는 국왕을 지낸 27명 가운데 18명과 추존된 국왕 1명을 합 하여 19명의 국왕과 왕비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나머지 국왕과 왕비의 신주는 영녕전에 모셔져 있다. 국왕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주는 종묘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종묘에 모셔진 국왕과 왕비의 신주는 왕실의 정통성을 반영한 것이다. 종묘에는 국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신실이 있다. 각 신실의 북쪽에는 감실을 설치하고, 그 중앙에 신주장을 두며..

조선 국왕의 상징물 - 국왕의 이름을 기록한 상징물(2), 어책

2) 어책 어책(御冊)에는 왕세자 시절에 받는 죽책(竹冊)과 국왕 시절에 받는 옥책(玉冊)이 있다. 죽책은 국왕이 왕세자․왕세자빈을 책봉할 때와 존호 및 시호를 수여할 때 사용하였다. 왕세자를 책봉할 때에는 교명, 죽책과 함께 은인을 주었다. 죽책은 죽간 5~6조각을 책자 형태로 엮어 해서체 글자를 새기고 글자에 니금(泥金)을 입히며, 변철로 고정하여 둥근 고리와 돌쩌귀로 연결한다. 죽책의 앞뒷면은 비단으로 장식하였다. 죽책의 문장은 사륙변려문을 쓰며, 착한 일을 권하고 나쁜 일은 하지 말라고 경계하는 내용이다. 효명세자는 1812년(순조 12) 7월 6일에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세자 책봉식을 거행하였다. 세자의 나이는 4세였다. 다음은 순조가 효명세자에게 내린 죽책문의 내용이다. 저사(儲嗣, 후계자)를 ..

조선 국왕의 상징물 - 국왕의 이름을 기록한 상징물(1), 어보

1) 어보 어보(御寶)는 국왕이 사용하는 도장을 말한다. 왕세자 시절에 받는 은인(銀印)과 국왕 시절에 받는 금보(金寶)가 있다. 국왕의 새로운 이름이 정해지면 이를 기록한 어보와 어책이 동시에 만들어졌다. 따라서 국왕이 새로운 이름(존호, 묘호, 시호, 전호, 능호)을 받을 때마다 어보는 새롭게 만들어졌다. 국왕이 왕세자를 책봉할 때 교명(敎命), 죽책(竹冊)과 은인(銀印)을 내렸다. 왕세자의 은인에는 ‘왕세자인(王世子印)’이라 새겼다. 왕세자인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할 때는 대리청정을 할 때이다. 왕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 왕세자의 명령서나 관리 임명장에 이 은인이 찍혔다. 조선 국왕이 중국 황제에게 책봉을 받을 때 받는 책봉인도 어보에 해당한다.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 새겨진 책봉인은 중요한..

대한제국 말기 집집마다 초상사진을 걸어둔 까닭은?

대한제국 말기 집집마다 초상사진을 걸어둔 까닭은? “짐(朕)이 머리를 깎아 신하와 백성들에게 우선하니 너희들 대중은 짐의 뜻을 잘 새겨서 만국(萬國)과 대등하게 서는 대업을 이룩하게 하라.” - 『고종실록』 32년 11월 15일 고종 32년(1895년) 11월 15일에 고종이 단발령을 내리자 온 나라가 들끓습니다. 조정에서는 단발령을 내리는 까닭으로 단발을 함으로써 만국과 동등해질 수 있고 위생적이며 활동적임을 내세웁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곧 ‘몸과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를 금과옥조로 삼아서 머리카락 자르는 것을 불효로 보았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지요. 그래서 백성들은 단발령을 완강히 거부했고, 이에 순검들이 길거리에서 상투를 마구 자르거나 민가에 들어..

영친왕비의 가체를 장식한 대봉잠

영친왕비의 가체를 장식한 대봉잠 몇 년 전 방영된 드라마 에서 훤은 무녀 월이 연우였음을 깨닫고 연우가 있는 활인서로 한걸음에 달려가 감격적으로 재회합니다. 훤은 연우를 편전으로 데려가 과거 연우에게 선물했던 봉잠 ‘해를 품은 달’ 한 쌍을 준 뒤 “하나는 내 달이 돼달라는 청혼의 징표로, 또 하나는 그대가 나의 정비가 되는 날 이곳에서 줄 생각이었는데 이제야 하나가 됐다”며 키스하는 장면이 등장하지요. 조선시대 왕비들이 가체에 꽃던 비녀에는 매화를 새긴 ‘매잠’, 석류를 새긴 ‘석류잠’, 봉황 모양을 새긴 ‘봉잠’, 대나무 마디 무늬를 넣은 ‘죽절잠’ 등이 있는데 그 화려함이 보는 사람 누구나 탄성을 자아내게 합니다. 그 가운데 에 등장했던 봉잠은 머리 부분에 봉황 모양을 새긴 큰 비녀입니다. 국립고궁..

(얼레빗 4666호)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 오늘 순국

“한 잔 술을 차려 놓고 ‘우리 상진아’ 하고 가슴을 치면서 고한다. 네가 죽던 날, 주검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을 때는 성안에 있는 네 벗들이 모두 너를 어루만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었다.(…) 길거리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길을 가던 남모르는 나그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義士)의 삼년상을 마치던 날 대한제국 홍문관 교리였던 박 의사의 아버지 박시규가 비통한 심정으로 지은 제문 일부입니다. ▲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1884. 12. 7~1921. 8. 13), 출처 국가보훈처 박상진 의사는 나라를 잃은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지만, 곧바로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박 의사는 1915년 대구..

(얼레빗 4525호) 115년 전 일제, 통감부 설치하고 조선 지배

지금으로부터 115년 전인 1906년 2월 1일 일제는 조선을 관리 감독하기 위한 기구인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 통감부는 서울에 설치한 통치기구로써 1910년 조선총독부가 설치될 때까지 통감부는 4년 6개월 동안 한국의 국정 전반을 사실상 장악했지요. 이때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했으며, 통감정치의 실시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일제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 통감부 청사(출처, 위키백과) 그러나 일제는 통감부 설치 이후에도 대한제국 정부를 그대로 두었는데, 이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위장하고 조선 사람들의 반일 기세를 무마하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요. 또한, 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