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141

주기와 주년

영화 평론가들로부터 그리 호평을 받지 못하였음에도 는 ‘아이들과 함께 볼 만한 영화’로 흥행을 이루며 개봉 20일 만에 270만 관객을 넘어섰다. 일반에 덜 알려졌던 조선어학회의 일제강점기 활동을 조금이나마 비추어낸 것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성과이다. 조선어학회 중심인물 가운데 한결 김윤경 선생이 있다. 김윤경 선생은 주시경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로서 조선어학회(뒷날 한글학회)와 평생을 함께하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난을 겪은 선생이 오는 2월 3일, 50주기를 맞이한다. 어떤 특정한 일이 일어난 때를 기리어 1년씩 기준하여 헤아리는 단위로 ‘주년’과 ‘주기’가 있다. 해마다 돌아오는 그 날을 순 우리말로 ‘돌’이라고 하는데, 이 돌이 돌아온 해를 바로 ‘주..

의거, 순국선열

3.1운동 100돌을 맞이하여, ‘3.1운동’ 명칭에 관한 논의가 잦다. ‘운동’은 국어사전에서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힘쓰는 일. 또는 그런 활동.”이라 풀이되어 있다. 온 나라 백성이 일제로부터 독립을 되찾고자 일시에 만세를 부른 일이니 ‘운동’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날의 민족적 저항을 단순히 ‘독립을 이루려고 힘쓰는 일’로 낮추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많다. 일제의 강압적 침탈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기 위해 봉기한 ‘의거’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의거’는 국어사전에서 “정의를 위하여 개인이나 집단이 의로운 일을 도모함.”이라 풀이하고 있다. 3.1의거 때 순국한 선열들의 피는 아직도 뜨겁다. ‘순국선열’은 국어사전에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윗대의 열사”로 풀이되어 있다. 다른 민..

(얼레빗 4493호) 고난과 아픔의 지광국사탑, 복원 끝내고 대기

강원도 원주에 가면 사적 제466호 법천사(法泉寺)터가 있습니다. 법천사는 통일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창건된 절로 고려 중기에는 대표적인 법상종 절이었으며, 고려 문종 때 국사(國師)였던 지광국사(984~1070)가 열반에 든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원래 지광국사탑이 있었습니다. 현재 국보 제101호로 지정된 높이 6.1m의 이 탑은 독특한 구조와 화려한 조각, 뛰어난 장엄장식으로 역대 가장 개성적이고 화려한 승탑으로 꼽힙니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코끼리의 눈을 형상화한 안상, 불경에 나오는 상상의 새인 가릉빈가, 연꽃, 봉황 무늬 등이지요. ▲ 국보 제101호 ‘원주 법천사터 지광국사탑’ 지광국사탑은 일제강점기인 1911년 일본인에 의해 원주에서 서울로 왔다가 1912년 일본 오사카로 반..

(얼레빗 4429호) 광고판, 영어로 도배한 것과 한글이 주인인 것

여기 롯데백화점의 광고판이 영어로 도배되었습니다. 광고판 어디를 봐도 한글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광고를 하면서 영어를 전혀 쓰지 않도록 하는 것이야 주문할 수 없겠지만 한국인 상대의 광고를 하면서 마치 미국의 광고판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면 문제일 것입니다. 원래 롯데백화점 광고가 대부분 영어로 도배하곤 했지만 그래도 이번처럼 영어 일색이진 않았는데 이번엔 참으로 심한 모습입니다. ▲ 영어로 도배한 롯데백화점 광고판 ▲ 한글이 주인인 신세계백화점 광고판 그런데 가까운 곳에 있는 신세계백화점의 광고판은 뜻밖에 SHINSEGAE란 자신들의 상호를 빼면 모두 한글 일색입니다. 그것도 흔히 쓰는 ’추석’이란 한자말 대신 우리말 ‘한가위’를 쓰고 그밖에 감사와 명절이란 한자말 말고는 모두 토박이말을..

(얼레빗 4417호) 친일시 뜯어내고 차례는 창호지로 가린 시집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 의 시인 노천명은 109년 전 오늘(9월 1일) 태어났습니다. 그 노천명은 두산백과에 ‘한국의 시인’이라고 요약되어 있지만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ㆍ13ㆍ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노천명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청년들의 적극적인 전쟁 참여를 권유하는 , , 등을 발표하고, 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산하 부인대(婦人隊) 간사를 맡을 정도로 친일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천명에게는 웃지 못할 일화가 따라 다닙니다. 그것은 광복 직전인 1945년 2월 25일 펴낸 시집 《창변(窓邊)》에 관한 이야기지요. 노천명은 《창변》 출판기념회를 열었는데 이 시집 끝에는 9편의 친일시가..

서경덕 교수 "송혜교, 우리나라 역사에 진정성 깊어"

송혜교는 최근 광복절을 맞아 서경덕 교수와 의기투합해 일본 우토로 마을에 한국어 대형 안내판을 기증했다. 송혜교는 지난해 한글날에도 우토로 마을을 소개하는 한글 안내서를 기증하기도 했다. 우토로 마을은 일제 강점기였던 1941년 강제징용된 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사람들의 정착촌이다. 철거 계획으로 교민들이 강제 퇴거 위기를 맞자 정부와 시민 단체의 지원금으로 토지 일부를 매입했다. 이와 관련해 서경덕 교수는 “9년 동안 전 세계에 있는 독립운동 유적지에 한국어 서비스 아니면 한글 간판 등을 기증하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진행해 왔다”며 “송혜교는 우리나라 역사에 관련해 굉장히 진정성이 있다. 앞으로도 꾸준하게 캠페인 형식으로 함께 진행해 나아갈 예정이다”고 밝혔다.

(얼레빗 4387호) ‘탁류’ㆍ‘레디메이드 인생’ 작가 채만식

”물은 탁하다. 예서부터 옳게 금강이다. (가운데 줄임)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시가지)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일제강점기 소설가 채만식의 소설 《탁류(濁流)》의 앞부분입니다. ▲ ‘탁류’ 작가 채만식, ‘탁류’ 초판본 / 문화체육관광부 제공 118년 전인 1902년 오늘(7월 21일) 태어난 채만식은 1924년 단편 「새길로」를 《조선문단》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한 뒤 290여 편에 이르는 장편ㆍ단편소설과 희곡ㆍ평론ㆍ수필을 쓴 작가입니다. 특히, 1930년대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는데, 장편으로는 「..

(얼레빗 4385호) 연호, 서기(西紀) 말고 단기(檀紀)로 쓰기

“연호(年號)”란 임금이 즉위한 해에 붙이던 이름이며, 해의 차례를 나타내려고 붙이는 이름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예수가 태어난 해를 원년으로 하는 “서기(西紀)”를 쓰고 있지요. 그런데 서기 이전에는 “정삭(正朔)” 곧 중국의 달력을 사용하여 중국의 연호를 같이 썼습니다. 신라는 물론 고려의 대부분과 조선에서도 중국의 연호를 썼는데 자주적인 생각이 강하던 때는 독자적인 연호를 쓰기도 했지요. ▲ 단기가 쓰인 4282년(1949) 약력과 서기로 쓰인 1964년 역서 ▲ 4287년(1954) 무렵엔 단기와 서기를 함께 썼다. 특히 강성한 나라를 세워 넓은 나라땅을 가졌던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즉위한 391년부터 “영락(永樂)”이란 연호를 써서 문헌상 우리나라 첫 독자적인 연호로 기록됩니다. 나라를 ..

(얼레빗 4372호) 곡식 말리고, 윷놀이ㆍ멍석말이도 하던 멍석

“저녁을 먹고 나서는 뜰이나 마루에 보리집자리나 멍석가튼 것을 펴고 왼가족이 다 나와 안습니다. 그리고 솔깡이나 겨릅가튼 것으로 우둥불을 놋습니다. 그리고는 내일은 무엇을 하느니 아무 논벼는 몃섬이 나느니 팟종자를 개량한다느니 목화바테 무명이 만히 피엇다느니 하야 한참동안 구수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는 부인네들은 혹 바느칠도하고 혹 삼도 삼고 혹 이야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 잡지 《개벽 제4호》 1920년 9월 25일 자의 ‘농촌의 밤’이 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정겨운 시골 저녁 마당 분위기가 느껴지지요. ▲ 멍석 깔고 판을 벌여볼까? 지금은 전통한식점, 전통찻집 등에서 멋으로 둘둘 말아 한쪽 벽을 꾸미는 쓰임으로 전락했지만, 멍석은 예전 우리 겨레에게 친근한 삶의 도구였습니다. 멍석은 주로 짚으로..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 기념우표

많은 사람이 일제 강점기를 피해와 굴욕의 역사로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 하 35년의 역사 속에도 민족의 주체성을 지키고자 일제와 싸워 값진 승리를 거둔 기록이 존재합니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운동사에서 ‘독립전쟁 제1회전’으로 불리는 최고의 전과 중 하나로 우정사업본부는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을 맞아 기념우표를 발행합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의 독립군은 규모를 키우고 조직력도 갖추게 되었습니다. 독립군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진격하는 국내진공작전을 벌였습니다. 1920년 6월 4일 새벽에도 신민단 소속 독립군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진입하여 일본군 초소를 격파하고 화룡현 월신강 삼둔자로 복귀하였습니다.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