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12

(얼레빗 제4959호) <세한도> 기증한 손창근, 조용히 세상 떠

국보 등 대를 이어 모은 여러 문화유산을 기증한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 선생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선생의 아들인 손성규 연세대 교수는 "지난 11일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가족장으로 모셨다"라고 17일 밝혔습니다. 선생은 마지막 순간에 소식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고, 가족들은 선생의 뜻에 따라 논의를 거쳐 조용히 장례를 치렀습니다. 개성 출신 실업가인 부친 손세기(1903∼1983) 선생과 함께 대(代)를 이어 모은 이른바 '손세기ㆍ손창근 수집품'은 그림, 책 등 다양한 종류의 문화유산이 포함돼 큰 관심을 끌었지요. 특히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이며, 그 값어치를 가늠할 수조차 없다는 국보 를 나라에 기증한 것은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로 선생을 초대해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마음속에 102개 벼루를 품은 부자 조희룡

추사 김정희를 50년 동안 스승으로 모시고 글씨와 그림을 배운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은 중인 출신 화원이었습니다. 그는 벼루를 극진히 사랑했던 사람이지요. 자신의 서재 이름도 ‘102개의 벼루가 있는 시골집’이라는 뜻으로 ‘백이연전전려百二硯田田廬’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조희룡이 벼루를 좋아했던 것은 쉽게 뜨거워졌다가 쉽게 차가워지는 염량세태炎涼世態 속에서 벼루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벼루는 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그렇게 아끼던 벼루도 그가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왔을 때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하지만 눈앞에 벼루가 남아 있지 않았어도, 그는 매화가 활짝 필 때면 그토록 아끼던 벼루를 꺼내 여전히 먹을 갈았지요. 평생 마음속에 담아둔 벼루는 그대로 남..

(얼레빗 4646호) 추사, 여름날 북한산 올라 순수비 탁본 떠

순조 16년(1816년) 7월 된더위가 숨을 헐떡거리게 하는 뜨거운 여름날이었습니다. 금석학과 고증학에 한창 심취하고 있던 31살의 추사 김정희는 동무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 비봉 꼭대기에 있는 수수께끼의 옛 비석을 조사ㆍ판독하기 위하여 가파른 암벽을 기어 올라갔지요. 그동안 이 빗돌은 조선 초 태조의 왕사 무학대사와 관련이 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끼 속의 비문을 짚어 나가다가 깜짝 놀라게 됩니다. 비문 내용이 무학대사와 전혀 다른 1천 수백 년 전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 국보 제3호 , 국립중앙박물관 추사는 빗돌을 확인하고 얼마나 기뻤던지 빗돌 옆에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다. 병자년 7월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읽어보았다.”라는 발문을 쓰고 내려옵니..

(얼레빗 4489호) 14.7m에 이르는 대작 세한도 보러 갈까요?

시인 도종환은 자신의 시 ‘세한도’에서 “견디며 깨어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겹게 아름답다.”라고 노래한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국보 제180호 세한도(歲寒圖)는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특별 전시되고 있습니다. 추사가 그림에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곧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송백이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라고 썼기에 우리에게 라고 알려졌습니다. ▲ 추사 김정희의 국보 제180호 외부와 단절된 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던 추사는 58살이 되던 해(1844년), 초라한 집 한 채와 소나무 한 그루, 측백나무 두 그루를 그린 세한도(歲寒圖)입니다. 고립무원의 유배지에 남겨져 있는 자신을 잊지 않고 유배 중인 중죄인을 도우면 중벌을 받을 수 있음에도..

(얼레빗 4428호) 슬프고 힘들 때도 붓을 들었던 추사 김정희

천하의 명필이라는 추사 김정희. 그는 그렇게 으뜸 명필이 되기까지 그가 낯선 유배지에서 쓰라리고 고독한 시간 속에서 자신을 담금질하면서 부단한 노력을 한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화날 때도 붓을 들었고, 외로울 때도 붓을 들었으며 슬프고 지치고 서러움이 북받칠 때도 붓을 들었다고 합니요. 그리고 어쩌다 한 번씩 반가운 편지와 소식이 올 때는 자다가도 일어나 붓을 들었습니다. ▲ 추사 김정희 자화상, 종이에 담채, 32×23.5㎝, 선문대박물관 소장 한번은 친구 김유근이 자신의 벼루에 추사의 글씨를 새기겠다고 글씨를 부탁하자 자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글씨체를 연습했다고 하지요. 또 후배 윤정현이 호를 써달라고 하자 윤정현이란 인물에 걸맞은 글씨체를 찾으려고 고민하다 무려 30년 만에 글씨를 써주..

(얼레빗 4420호) 무가지보 세한도, 국민 품에 안기다

금전으로는 그 값어치를 평가할 수 없다는 무가지보, 국보 제180호 가 지난 8월 21일 국립중앙박물관 품에 안겼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세한도’는 조선 후기 올곧은 선비 정신이 오롯이 담겨있는 문인화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요. 제주도에서 유배 중이던 스승 추사를 위해 그의 제자였던 역관 이상적은 새롭게 들어온 중국의 문물 자료를 모아 스승에게 보내주는데, 이를 고맙게 여긴 추사가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려 선물한 것이 바로 ‘세한도’입니다. ▲ 추사 김정희의 국보 제180호 그런데 이 세한도는 해방 직전인 1944년 일본인 수집가 후지스카 지카시(藤塚隣)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를 안 서예가 손재형은 연일 공습으로 아수라장이 된 도쿄의 후지즈카 집에 100일 동안 날마다 찾아가 문안인사를 하며, ..

(얼레빗 4363호) 추사, 죽은 아내에게 반찬 투정

那將月姥訟冥司(나장월모송명사) 월하노인과 함께 가 옥황상제에게 하소연하여 來世夫妻易地爲(내세부처역지위) 내세에는 내외가 처지를 바꾸어서 我死君生千里外(아사군생천리외) 나 죽고 그대는 천 리 밖에 살아남아 使君知我此心悲(사군지아차심비) 그대가 나의 이 슬픔을 알게 할까? 이는 추사 김정희의 곧 ‘죽은 아내를 생각하여 슬퍼함’이라는 한시입니다.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 있는 사이 그의 나이 57살인 1842년 11월 13일 본가 예산(禮山)에서 아내 예안 이씨가 죽었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는 추사는 계속 아내에게 편지를 썼지요. 그 가운데는 특히 제주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며, 젓갈 등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전해지는 추사의 한글편지는 40통인데 그 가운데 대부분이 아내에게 쓴 것이라..

(얼레빗 4360호) 사랑방에 꼭 있었던 선비의 벗 연상(硯床)

텔레비전 사극에 보면 정갈한 사랑방에서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글을 읽는 선비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때 선비가 책을 올려놓고 보는 앉은뱅이 작은 책상을 서안(書案)이라 하고 그 옆에 벼루와 먹 그리고 붓을 넣어두는 상자가 있는데 이를 ‘연상(硯床)’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서안과 연상은 옛 선비들 사랑방에 꼭 놓여있었던 가구였습니다. ▲ 벼루, 붓, 먹, 연적을 넣어두었던 선비의 벗 연상(硯床) 높이 16∼30㎝의 작달막한 연상은 윗부분에 뚜껑을 덮고 그 안에 벼루를 넣어 둡니다. 어떤 연상은 뚜껑이 없이 벼루를 바로 쓸 수 있게 해놓은 것도 있는데 이 이름은 따로 ‘연대(硯臺)’라 합니다. 그리고 아래로는 서랍을 두어 붓이나 먹, 연적을 넣어두기도 합니다. 또 문갑이나 서안과 겸한 것들도 눈에 띕니다. ..

(얼레빗 4310호) 경매에 나온 정약용 《행초 다산사경첩》

지난 3월 24일 서울옥션에서는 제155회 미술품 경매가 열렸습니다. 이때 눈에 띄는 것은 정약용이 쓴 《행초 다산사경첩(行草 茶山四景帖)》이었습니다. 이는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유배 시절부터 적어온 시와 글들의 모음입니다. 전남 강진에 머물던 1809년에 쓴 〈다산사경(茶山..

(얼레빗 4022호) 비문 309개를 완전히 익혔던 추사

한국문화편지 4022호 (2019년 02월 26일 발행) 비문 309개를 완전히 익혔던 추사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022][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완당노인네 추사의 글씨는 어려서 늙을 때까지 서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에 뜻을 두었고 24살에 북경에 다녀온 후부터는 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