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박이말 119

[옛배움책에서 캐낸 토박이말]부치다 오래되다 고른수 따오다 모조리

오늘은 4285해(1952년) 펴낸 ‘과학공부 5-2’의 41쪽부터 42쪽에서 캐낸 토박이말을 보여드립니다. 41쪽 첫째 줄부터 둘째 줄에 걸쳐 ‘더욱 더 잘 삭여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요즘 말로 바꾸면 ‘더욱 더 잘 소화시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줄에 있는 ‘빨아들이고, 남는 것을 큰창자로 보낸다.’는 것은 요즘 배움책이라면 ‘흡수하고 남는 것을 대장으로 이동시킨다’고 했지 싶습니다. 여기 나오는 말 가운데 ‘큰창자’는 흔히 쓰는 ‘대장’을 가리키는 말이고 그 다음 줄에 있는 ‘밥통’은 ‘위’, ‘작은창자’는 ‘소장’을 가리킵니다, ‘대장’, ‘큰창자’, ‘소장’, ‘작은창자’ 짜임은 요즘 배움책에서 그렇게 쓰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고, ‘밥통’은 ‘위’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얼레빗 4567호) 꽹말타기, 딩각, 콩나물히찝을 아십니까?

영남지방에는 일제의 강압으로 맥이 끊겼던 ‘호미씻이’와 비슷한 ‘꽹말타기’라는 민속놀이가 있었습니다. 이 꽹말타기는 ‘징, 장구, 북, 꽹과리’ 외에 ‘딩각’을 더해 ‘오물놀이’를 즐겼다고 합니다. ‘딩각’은 나무로 길게 만든 나팔 모양인데 울산광역시의 반구대 암각화에도 ‘딩각’을 의 형태로 보이는 그림이 새겨져 있어 딩각은 선사시대부터 쓰였던 악기라고 짐작할 수도 있지요. 그런데 민속놀이인 꽹말타기가 사라지면서 ‘딩각’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 지금은 사라진 영남지방의 민속놀이 ‘꽹말타기’, 맨앞에 ‘딩각’이란 악기가 있다. 또 경상북도 상주에는 콩나물을 삶아 콩가루에 버무려 만든 ‘콩나물히찝’이란 음식이 있는데 그것도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군사정권 시절 사투리를 쓰면 안 되..

(얼레빗 4553호) 모종비 내리는 봄, 예쁜 우리말 비 이름들

“겨울내내 목이 말랐던 꽃들에게 / 시원하게 물을 주는 고마운 봄비 / 봄비가 내려준 물을 마시고 / 쑥쑥 자라는 예쁜 꽃들 / 어쩜 키가 작은 나도 / 봄비를 맞으면 / 키가 쑥쑥 자라지 않을까? / 봄비야! 나에게도 사랑의 비를 내려서 / 엄마만큼, 아빠만큼 크게 해줄래?” -홍가은/강릉 남강초교 3년- 파릇파릇한 새싹을 키우는 봄비는 대지를 촉촉이 적시고 가은이의 꿈도 쑥쑥 자라게 합니다. 우리 토박이말 중엔 비에 관한 예쁜 말이 참 많습니다. 봄에는 ‘가랑비’, ‘보슬비’, ‘이슬비’가 오고 요즘 같은 모종철에 맞게 내리는 ‘모종비’, 모낼 무렵 한목에 오는 ‘목비’도 있지요. 여름에 비가 내리면 일을 못 하고 잠을 잔다고 하여 ‘잠비’,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내리는 시원한 소나기가 있습니다. ..

(얼레빗 4538호) 오늘 우수 그리고 '이레놀음' 즐기는 초이렛날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둘째 ‘우수’입니다. 우수날에 비 오면 까끄라기 있는 곡식들, 밀과 보리는 대풍을 이룬다 했지요. 보리밭 끝 저 산너머에는 마파람(남풍:南風)이 향긋한 봄내음을 안고 달려오고 있을까요? 동네 아이들은 양지쪽에 앉아 햇볕을 쬐며, 목을 빼고 봄을 기다립니다. "꽃샘잎샘 추위에 반늙은이(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계절 인사로 "꽃샘잎샘 추위에 집안이 두루 안녕하십니까?"라는 것도 있지요. 또 봄을 시샘하여 아양을 떤다는 말로 화투연(花妬姸)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꽃샘추위라는 토박이말보다 정감이 가지 않는 말입니다. ▲ 오늘은 우수, 꽃봉오리 머금고 만물이여 생동하라(그림 이무성 작가) 우수에는 이름에 걸맞게 봄비가 내리곤 합니다. 어쩌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은 ..

산돌림과 재넘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산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말에는 산등성이, 산마루, 산모롱이, 산모퉁이, 산봉우리, 산비탈, 산자락, 산줄기 같은, 산에 관한 토박이말들이 무척 많다. 이처럼 산을 떠올리게 하는 우리말 가운데 산돌림과 재넘이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산의 일부를 가리키는 토박이말이 아니라, 각각 비와 바람의 이름이다. 산돌림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한 줄기씩 내리는 소나기’를 가리키는 순 우리말이다. 본디는 산기슭으로 돌아가며 잠깐씩 내리는 소나기를 산돌림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 비가 산 아래 마을로 옮겨가며 여기저기 흩뿌리게 되니까, 비록 산기슭이 아니더라도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내리는 소나기를 뭉뚱그려 산돌림이라고 부르게 된 것 같다. 재넘이는 ‘밤중에 산꼭대기에서 평..

가리

‘여줄가리’라는 토박이말이 있다. 본디의 몸뚱이나 원줄기에 딸린 물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휴대전화를 사면 딸려오는 액정 보호 필름이나 이어폰도 여줄가리이고, 사람 몸에 장신구로 쓰이는 머리띠나 머리핀, 귀고리, 반지, 팔찌 따위 액세서리들도 여줄가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토박이말 여줄가리는 중요한 일에 곁달린,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을 나타낼 때 주로 많이 쓰이게 되었다. 여줄가리를 떼어내면 ‘졸가리’가 된다. 그래서 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를 졸가리라고 불렀고, 사물의 군더더기를 다 떼어 버린 나머지의 골자를 졸가리라 하게 되었다. 우리 눈에 보이고 우리 귀에 들리는 갖가지 정보들에서 졸가리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정보 분석가라는, 졸가리를 찾는 꾼들이 생겨난 게 아닌가 한다. 이 졸가리..

무거리

주변을 돌아보면, 코로나19 사태로 사람들의 위생 관념이 많이 나아진 것을 느낄 수 있는 요즘이다. 마스크와 손 소독제 사용은 이제 필수적인 일상이 되었고, 가벼운 재채기나 기침을 하는 모습도 웬만해선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며칠 전에 어느 책에서 “손을 자주 씻는 습관이 생긴 것은 코로나19의 무거리 중 하나이다.”는 글을 읽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토박이말 ‘무거리’가 참 반가웠다. 우리 토박이말 무거리는 본디 ‘곡식을 빻아서 체로 가루를 걸러 내고 남은 찌꺼기’를 가리키는 말이다. 지금도 농촌에서는 무거리 고춧가루라든가, 무거리 떡이란 말을 쓰는 어른들을 더러 만날 수 있다. 이 말의 쓰임이 좀 더 넓혀져서, 예부터 무거리라고 하면 ‘변변치 못해 한 축에 끼이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

모도리와 텡쇠

사람의 생김새나 어떤 일 처리가 빈틈이 없이 단단하고 굳셀 때, ‘야무지다’, ‘야무진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빈틈없이 매우 야무진 사람을 나타내는 우리 토박이말이 ‘모도리’이다. 흔히 겉과 속이 단단하고 야무진 사람을 ‘차돌 같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때의 차돌은 모도리와 같은 뜻으로 쓰인 말이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차돌은 생김새가 단단한 사람을, 모도리는 일처리를 야무지게 하는 사람을 주로 일컫는 말로 많이 쓰인다는 것이다. 차돌이나 모도리와는 반대로, 겉으로는 무척 튼튼해 보이는데 속은 허약한 사람을 낮잡아서 우리 선조들은 ‘텡쇠’라 불렀다. 텡쇠는 아마도 ‘텅 빈 쇠’가 줄어들어 만들어진 말이 아닐까 하고 여러 학자들이 추측하고 있다. 현대문명에서 ‘텅 빈 쇠’ 하면 곧바로 깡통이 떠..

투미하다

돌연히 세상을 등져 버린 서울시장의 자취 뒤에 미투(Me Too) 논란이 다시금 불붙고 있다. 비록 들온말이지만 처음부터 ‘미투하다’는 말이 낯설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 이 말을 자주 듣다 보니 언뜻 ‘투미하다’는 우리말이 떠올랐다. 어리석은데다가 둔하기까지 한 사람을 가리키는 토박이말이다. 경상도 지방에서 ‘티미하다’고 하는 말의 표준말이 ‘투미하다’이다. 억눌리고 감추어 왔던 성 관련 피해 사실을 용기 있게 알려 여론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게 미투 운동인데, 아직은 투미한 사람들이 그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 사람은 투미해서 답답하기 짝이 없다.”처럼, 상대방이 자기 말을 잘 못 알아듣고 둔하게 반응할 때에 ‘투미하다’는 말을 쓸 수 있다. ‘투미하다’와 비슷한 뜻을 가진 한자말로 ..

외상말코지

어릴 때 어머니 심부름 가운데 가장 하기 싫었던 것이 외상으로 물건 사오기였다. 그렇잖아도 숫기가 없었던 터라 돈도 없이 물건을 사온다는 건 엄청난 부끄러움을 감내하고 대단한 용기를 내야 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신용카드 한 장으로 얼마가 됐든(그래도 5만 원 넘는 외상엔 간이 졸아들지만) 어디서든 외상을 떳떳이 한다. 달라진 시대는 두께가 1밀리미터 남짓한 플라스틱 안에 모든 부끄러움을 감출 수 있도록 만들었다. 순 우리말에 ‘외상없다’라는 말이 있다. “조금도 틀림이 없거나 어김이 없다.”는 뜻으로 쓰이는 토박이말이다. 가령, “그 사람은 참 성실해서 무슨 일이든지 외상없이 해놓곤 한다.”라고 쓸 수 있다. 신용카드는 비록 30일 안에 물건값을 치르면 되도록 외상을 주고 있지만, 그 약속을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