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76

(얼레빗 4633호) 서울 공평동에서 세종 때 금속활자 와르르

지난 6월 29일 문화재청은 서울 종로구 공평동 유적에서 항아리에 담긴 조선 전기에 만든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발굴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특히 이번에 공개되는 금속활자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가 반영된 가장 이른 시기의 한글 금속활자’입니다. 이번에 출토된 금속활자들은 조선 전기 다종다양한 활자가 한 곳에서 출토된 첫 발굴사례로 그 의미가 크다는 평가지요. ▲ 〈한글 금속활자〉, 대자(大字), 가로 1.5cm, 세로 1.2cm, 높이 0.7cm 특히, 이 활자는 지금까지 전해진 가장 이른 조선 금속활자인 세조 ‘을해자(1455년)’보다 20년 이른 세종 ‘갑인자(1434년)’로 추정되는 활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세종 ‘갑인자’는 세종 당시 천문기계를 제작하는 기..

(얼레빗 4480호) 백성에게 시간을 나눠준 세종의 오목해시계

“무엇을 하든 간에 / 때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겠거늘 / 밤에는 물시계(자격루)가 있지만 / 낮에는 알 길이 없더니 / 구리를 부어 기구를 만드니 / 형체는 가마솥과 같고 / 반경에 둥근 틀을 설치하여 / 남과 북이 마주하게 하였다 / (가운데 줄임) / 동물신의 몸을 그리기는 / 글자 모르는 백성 때문이요 / 각과 분이 또렷한 것은 / 햇볕이 통하기 때문이요 / 길가에 두는 것은 / 구경꾼이 모이는 때문이니 / 이제 비로소 / 백성이 일을 시작할 것을 알게 되리라” 이는 세종 때 오목해시계를 만들고 기록했던 김돈이 오목해시계를 만든 의의를 살피고 그 기쁨을 노래한 글입니다. 그 당시 시간을 측정하고 알리는 것은 임금 고유 권한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세종은 오목해시계를 만들어 누구나 볼 수 있게 ..

(얼레빗 4449호) 선조, 인원왕후 언문(한글)으로 교지를 쓰다

조선은 대부분 공식 문자 생활이 한문으로 이루어졌음은 누구나 아는 일입니다. 그런 만큼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지만 이후 언문(한글)이 푸대접받았을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궁궐 내 대비, 중전을 비롯한 내명부에서는 언문으로 교지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역대 임금 가운데 선조는 심지어 공식 문서인 교지에도 언문을 썼습니다. 선조가 교지를 언문으로 쓴 까닭은 무엇일까요? 《선조실록》 25년(1592년) 8월 19일 기록을 보면 “언서(諺書)로 방문(榜文, 길거리나 많이 모이는 곳에 써 붙이는 글)을 많이 써서 송언신에게 보내어 백성을 알아듣도록 하라.”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서 한문이 아닌 언서(한글)로 교지를 내린 까닭은 백성과 원활한 의사소통..

주시경의 표기 이론과 『국어문법』의 의미

‘국문의 어릿광대’ 『국문강의』(1906)의 발문에서 주시경은 “나는 다만 국문의 한 어릿광대 노릇이나 하려는 것이니, 고명하신 분들이 앞으로 말과 글을 연구하고 수정하여 좋은 도구로 만들어주시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그랬다. 그가 바랐던 것은 그저 ‘국문의 어릿광대’가 되는 것일 뿐이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국문’, ‘고명하신 분들’에게는 더욱 더 외면당하던 ‘국문’이 자신의 어릿광대짓으로나마 그분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면, 그리하여 진지한 연구의 대상이 되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자신은 족하다는 것이었다. ‘국문의 어릿광대 노릇이나 하겠다’는 주시경의 말은 그러나 그저 겸손의 표현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아마 당시에 그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국어 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받게 될지는 꿈에도 생..

실천적 지식인 주시경 선생의 업적

세종이 1443년 12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고 많은 책을 훈민정음으로 펴냈다. 특히 의서ㆍ농서 등 백성들의 실생활에 필요한 책과 어린이와 여성들을 위한 교훈서 등이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일반 백성ㆍ국민을 위하고자 하는 정책에는 기득권 세력의 거센 도전이 따른다. 당시 최만리 등 조정의 중신들과 각지의 유생들이 드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사대의 예에 어긋나며, 중국과 다른 문자를 쓰는 나라는 오랑캐들뿐’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군왕이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하였지만 지배층에서는 19세기까지 훈민정음을 언문(諺文)이라 비하하고, 어린이와 부녀자들의 글로 치부하였다. 말(언어)은 한국어로 하면서 글(씨)은 한문으로 쓰는 실정이었..

(얼레빗 4442호) 우리말 속에 한자말이 70~80%가 된다구요?

며칠 뒤면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훈민정음을 반포한 세종대왕의 뜻을 기리기 위한 제574돌 한글날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뜻을 지닌 한글날은 1990년에 바다의 날, 조세의 날과 같은 일반기념일이 되었습니다. 이에 한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글날 국경일 승격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덕분에 2005년 12월 8일 드디어 '국경일에관한법률중개정법률안'이 통과되어 국경일이 되었고, 2013년 한글날부터는 공휴일로 기리게 되었습니다. 그 뒤 해마다 한글날만 되면 큰잔치를 한다고 요란을 떨지만, 여전히 한글은 물론 우리말은 푸대접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푸대접의 바탕에는 “우리말 속에 한자말이 70~80%를 차지한다.”라는 한자를 숭배하는 학자들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이 말이 사실일까요?..

(얼레빗 4391호) 훈민정음을 한글이라 부르게 한 주시경 선생

“길고 긴 나의 학문의 바다 여정에서 직접 간접으로 나의 나아갈 길을 지도해 주신 스승이 적지 아니하였지마는, 그중에서 나에게 결정적 방향을 지시하였고, 따라 나의 추모의 정한을 가장 많이 자아내는 스승님은 조선 청년이 누구든지 다 잘 아는 근대 조선어학 최대의 공로자인 한힌샘 주시경 씨이다. (가운데 줄임) 오늘날 같으면 조선어 선생도 여기저기서 구할 수 있지마는 그 당시에는 주 선생 한 분뿐이었다.” 위는 잡지 《조광》 1936년 1월호에 실린 외솔 최현배 선생의 "조선어의 은인 주시경 선생"이란 글 일부분입니다. ▲ 주시경 선생(1876~1914)과 선생이 1914년 펴낸 《말의 소리》, 독립기념관 제공 평생 배달말(우리말)을 올곧게 사랑하고 실천하고 가르치신 한힌샘 주시경 선생(1876~1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