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배우자 2073

한국어 교육, 그리고 우리 - 대화? 또는 질문!

고속철이 나오기 전까지, 기차란 대표적인 장거리 여행 수단이었다. 이용자가 비교적 긴 시간을 머무는 공간인지라, 자리에 앉으면 으레 ‘어디까지 가세요?’라며 옆 사람과 인사부터 나누곤 했다. 동행자가 있는 사람에게는 같이 앉아 가라며 자리를 바꿔 주는 일도 예사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타고 가는 내내 마음이 불편할 수 있는 문화였다. 오늘은 25년 전 기차에서 겪은 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기차에 오르니 창 쪽 자리에 할머니 한 분이 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눈인사를 하며 앉는데, 할머니가 물으신다. “어디까지 가요?” “조치원까지 갑니다.” “조치원에는 왜 가요?” “집이 청주인데요, 청주에 바로 가는 기차가 없어서요.” “청주가 집인데 왜 대구서 타요?” 그 이후로도 질문은 이어졌다. 결혼은 했는지..

신 고사성어 - 다다익선, 많으면 과연 좋은가?

다다익선, 너무나 익숙한 말이다. 이 성어를 한 번도 말해 보지 않은 사람도 있을까.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거나 견강부회牽强附會 같은 말은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대화 중에 쓰기가 난감하다. 누군가가 쓰지 말라고 만류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갑자기 궁금해진 것이다. 많으면 많을수록 과연 좋은지. 적은 것보다는 많은 편이 낫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과연 그런가라고. 《사기》의 〈회음후열전〉이 ‘다다익선’의 출전이다. 한나라를 세워 한고조가 된 유방과 초왕楚王이었던 한신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한신은 고향인 회음으로 돌아와 회음후淮陰侯가 된다. (그러니 〈회음후열전〉은 ‘한신열전’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한신을 초왕으로 만든 유방이 세력이 커진 한신을 견제하기 위해 한신을 초왕에서 회..

우리말을 여행하다 - 한글가온길 편

빼곡한 건물 숲과 그 사이를 바삐 오가는 회사원들의 모습이 날마다 펼쳐지는 서울 세종대로. 이 분주한 거리에 이야기보따리가 샘물처럼 곳곳에 숨어 있는 길이 있다. 바로 ‘한글가온길’이다. 한글의 역사와 발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는 이 길을 한글학자 김슬옹 박사와 함께 걸었다. ‘한글가온길’은 2013년 서울시가 한글 창제 570돌을 맞아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고자 서울 세종대로 일대에 조성했다. ‘가운데’, ‘중심’을 뜻하는 ‘가온’이라는 순우리말을 써서 한글이 우리 삶과 역사에서 중심이 되어 왔다는 뜻을 담았다.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동상, 주시경 선생의 집터, 한글학회 등 한글과 관련 있는 이야기들이 길을 따라 촘촘히 이어진다. 오전 10시, 김슬옹 박사와 만나기로 한 한글회관으로 향했다. 김슬옹..

‘뉴 스페이스’는 ‘민간 우주 개발’로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보균, 이하 문체부)와 국립국어원(원장 장소원, 이하 국어원)은 ‘뉴 스페이스’를 대체할 쉬운 우리말로 ‘민간 우주 개발’을 선정했다. ‘뉴 스페이스’는 민간이 주도하는 우주 개발을 이르는 말로 정부가 주도하는 우주 개발인 ‘올드 스페이스(old space)’와 대비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문체부는 ‘쉬운 우리말 쓰기 사업’의 하나로 국어원과 함께 외국어 새말 대체어 제공 체계를 구축해 운영하고 있다. 문체부와 국어원은 지난 8월 17일(수)에 열린 새말모임*을 통해 제안된 의견을 바탕으로 의미의 적절성과 활용성 등을 다각으로 검토해 ‘뉴 스페이스’의 대체어로 ‘민간 우주 개발’을 선정했다. * 새말모임: 어려운 외래 용어가 널리 퍼지기 전에 일반 국민이 이해하기 쉬운 다듬은 말을..

찰나의 우리말 - 공손성이 문법성을 이길 때

그날도 심각한 표정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서 모니터를 응시하며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쓰던 원고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지우고 쓰고 지우고 쓰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눈동자는 모니터에 꽂아 두고 손을 뻗어 전화기를 들었다. 학교 행정직원 선생님의 목소리다. 필자에게 전할 서류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그 직원 선생님은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교수님, 혹시 지금 연구실에 계실까요?” 이 질문에 필자는 당황했다. 이 질문에 어떤 답을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서였다. 누가 연구실에 있느냐고 묻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필자에게 가져다줄 서류가 있다는 내용임을 파악한 후에는 전화에 집중을 하지 않았기에, 집중하지 않은 동안 필자가 맥락상의 주어를 놓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