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자루질하는 예절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말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합니다. 퇴계선생 같은 어른이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습니까?”
이 글은 퇴계 이황과 함께 16세기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불렸던 남명(南冥) 조식(曹植, 1501~1572)의 ≪남명집≫ <퇴계에게 드리는 편지>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 편지는 당시 퇴계와 고봉 기대승이 주도하고 있던 성리학 이론논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보낸 남명의 충고편지입니다.
선생은 1501년 6월 26일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에서 승문원 판교 조언형의 아들로 태어나 학문 연구에 열중했으나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습니다. 조선 중기의 큰 학자로 성장하여 이황과 더불어 당시의 경상좌․우도, 곧 오늘날의 경상남․북도 사림을 각각 영도하는 인물로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했습니다. 그는 학문을 알기만 하면 족한 것이 아니라 가난을 실제 몸소 체험(反躬體驗)하고 어른을 공경하는(持敬實行) 일이 중요한 것이라 주장했지요. 특히 경의(敬義)를 높였는데, 마음이 밝은 것을 경(敬)이라 하고 외적으로 과단성이 있는 것을 의(義)라고 하여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부생활을 처리하여 나간다는 의리철학 또는 생활철학을 표방했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不義)와는 일체 타협하지 않은 선비로 유명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정인홍, 곽재우, 김면 등 남명 문하에서 수많은 의병장이 배출된 것은 불의를 보고 침묵하지 않은 남명의 실천적 삶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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