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레빗) 3220. 설날 앞뒤로 액을 몰아냈던 세시풍속들

튼씩이 2016. 2. 14. 11:27

날마다 쓰는 한국문화 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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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9(2016). 2. 10.



“정월달에 드는 액은 정월이라 대보름날 액맥이 연으로 막아내고
이월에 드는 액은 이월이라 한식날 한식 차례로 막아내고
삼월달에 드는 액은 삼월이라 삼짇날 제비새끼 명마구리 연자초리로 막아내고
사월달에 드는 액은 사월이라 초파일날 부처님 전에 관등놀이로 막아내고
오월달에 드는 액은 오월이라 단오날 그네줄에다 막아내고“

위는 강화도의 <고사소리> 곧 <횡수막이 타령> 가운데 일부인데 1월에서 12월에 드는 액을 나열하면서 그 각각의 액을 막아내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되지 않았던 옛 사람들은 무서운 질병이나 사고가 나도록 만들기도 하고, 인간관계를 갈등과 파국으로 이끄는 사악한 힘을 지닌 액을 막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지요. 문헌상으로 나타나는 액막이는 고려시대의 나례(儺禮)였는데 섣달 그믐날 궁중·관아·민간에서 가면을 쓴 사람들이 액을 막는 도구를 가지고 주문(呪文)을 외면서 귀신을 쫓는 동작을 해서 묵은해의 잡귀를 몰아내던 의식이었습니다.

액막이 가운데 지금까지 그 맥이 이어지는 것들도 있는데 먼저 섣달 그믐날의 “수세(守歲)” 곧 “해지킴”이 있습니다. 해지킴은 방, 뜰, 부엌, 곳간, 변소 할 것 없이 집안 구석구석에 불을 밝혀 놓고 잠을 자지 않으며 잡귀의 출입을 막았는데 해지킴을 하지 않고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고 믿었지요. 또 섣달 그믐날 밤에 오는 양괭이(야광귀-夜光鬼)라는 귀신이 신을 신고 가면 액이 들러붙기에 신을 엎어놓거나 감춰둡니다. 그밖에 정월의 액막이로는 한해 빠진 머리카락을 모았다가 태우는 “원일소발(元日燒髮)’, 연에 액(厄) 자를 써서 멀리 날려 보내는 ”송액(送厄)“, 제웅(허수아비)을 만들어 길에 버려 액을 물리치는 ”제웅버리기(제웅치기, 허제비버리기)“ 따위도 있습니다. 이제 이런 액막이를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나쁜 액을 몰아내려는 마음만은 버리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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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이야기 336 >

스물네 살 청년 송계백과 2ㆍ8독립선언



1919년 3ㆍ1만세운동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반드시 2ㆍ8동경독립선언을 이야기 한다. 엊그제 설날이 바로 97년 전 동경 YMCA에서 유학생들이 나라의 독립을 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적국 일본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날이지만 그만 설날에 묻혀버려 아무도 이 날을 기억하지 않아 씁쓸했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유학생들은 유학생 학우회 총회를 한다는 명목으로 4백여 명의 학생들이 재일본도쿄조선YMCA (현재의 재일본한국YMCA) 강당에 모였다. 동경 경시청에서도 이미 눈치를 채고 오전부터 수십 명의 정·사복 경찰을 파견하여 삼엄한 감시를 했다. 그런 가운데 식은 진행되어 회장인 백남규의 개회선언, 최팔용의 조선청년 독립단의 발족 동의, 백관수의 독립선언서 낭독, 김도연의 결의문 낭독에 이어 서 춘이 연설하려 하자, 일본 경찰이 무력으로 개입하여 학생 대표들을 모조리 검거하였다.

송계백 선생도 이날 함께한 유학생이었다. 선생은 평안남도 평원(平原) 사람으로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재학 중, 2ㆍ8 독립선언에 참가한 11명 대표 가운데 한 분이다. 선생을 포함한 재일 유학생들은 자나 깨나 조국광복의 꿈을 키워 왔는데, 2ㆍ8독립선언이 있기 2년전 인 1916년 4월 17일 당시, 재일 유학생들은 모두 5백 24명이었다.

일본 경찰은 일본 내 조선 유학생들의 동정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며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유학생들의 항일의식을 기준으로 갑, 을로 구분하여 철저한 감시를 했다. 그러나 1910년 이래 일본에서는 조선기독교청년회(朝鮮基督敎靑年會)ㆍ조선유학생 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ㆍ조선여자친목회(朝鮮女子親睦會) 같은 재일유학생 친목단체들이 있어서, 회원들의 지ㆍ덕ㆍ체의 함양과 학문 연구의 목적 말고도 조국 광복을 위한 비밀결사 단체 성격의 운동을 하고 있었다.

1918년 12월 하순, 조선유학생 학우회가 주최한 웅변대회가 동경 YMCA 강당에서 열렸는데 이 때 연사로 나온 서 춘·이종근·김상덕·윤창석 등은 한결같이 민족자결주의 원칙 아래 자주독립을 획득할 것을 주장하였다. 웅변대회가 끝난 뒤, 독립운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는데, 그 결과 송계백 선생은 최팔용·백관수·김철수·이광수·최근우·김도연·이종근·김상덕·윤창석 등과 함께 대표위원으로 뽑혔다.

이들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가며 거사 준비를 하였는데,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은 이광수가 작성하되, 최팔용 이하 9명의 대표들이 자필로 서명하여 영어와 일어로 번역하여 일본의 조야(朝野)와 외국 공관에 보내기로 하였다. 또 이 운동을 동경에서만 그칠 것이 아니라 거족적으로 확산시키기로 하고, 송계백 선생은 국내에서 활동하기 위하여 몰래 귀국하였다.

선생은 보성중학(普成中學) 출신으로 전 보성중학 교장인 최린과 사제지간이므로 선생을 통하여 송진우·현상윤·최남선 등과 만나 유학생들의 계획을 알리고 지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이후 송계백 선생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서 정노식으로부터 거액의 독립운동 보조금과 선언문 인쇄에 필요한 활자를 얻었고, 여자 유학생인 김마리아와 현덕신에게서도 성금을 보조받아 준비를 하였다. 거사를 하루 앞둔 2월 7일 저녁,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최팔용 등의 대표와 백관수의 집에서 만나, 자신들이 체포될 것을 각오하고 뒷일을 후배들에게 부탁하였다. 이렇게 해서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YMCA 강당에 모여 독립선언을 하게 된 것이 2ㆍ8독립선언이다.

송계백 선생은 그해 6월 26일 제2심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혐의로 7개월 15일간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24살의 나이로 순국의 길을 걷게 된다. 3ㆍ1만세운동 정신도 희미해져 가서 안타깝지만 2ㆍ8독립선언에 대한 우리들의 무관심에 더욱 가슴이 아프다. 도쿄에 가면 2ㆍ8독립선언이 있었던 YMCA에 한번 들러 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이곳에는 재일본한국YMCA 창립 10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에서 지원하여 <2ㆍ8독립선언기념자료실>을 2008년 5월 17일에 개설해놓아 누구든지 관람할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현재 재일본한국YMCA이 운영하는 누리집 <http://www.ymcajapan.org/ayc/2_8/KR/index.html>의 <2ㆍ8독립 선언 기념 자료실> 관리가 잘 안 되고 있는 점이다. 올해가 2016년인데 아직도 2012년도의 낡은 자료만 올려놓고 있어서 아쉬울 뿐이다.

* 일본한자는 구자체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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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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