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있는 이야기/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얼레빗) 3369. 오늘은 처서, 책도ㆍ옷도ㆍ고추도 말리는 때

튼씩이 2016. 8. 23. 16:27

날마다 쓰는 한국문화 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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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 4349(2016). 8. 23.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넷째인 “처서(處暑)”입니다. 처서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라고 할 만큼 여름은 가고 본격적으로 가을 기운이 자리 잡는 때입니다. “處暑”라는 한자를 풀이하면 “더위를 처분한다.”라는 뜻이 되지요. 하지만 아직 찌는 듯한 더위는 처서를 무색하게 합니다. 처서 무렵엔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라고 하는데 모기 입이 삐뚤어지기는커녕 아직 매미만 신이 난 듯합니다.

“처서에 창을 든 모기와 톱을 든 귀뚜라미가 오다가다 길에서 만났다. 모기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란 귀뚜라미가 그 사연을 묻는다. ‘미친놈, 미친년 날 잡는답시고 제가 제 허벅지 제 볼때기 치는 걸 보고 너무 우스워서 입이 이렇게 찢어졌다네.’ 라고 대답한다. 그런 다음 모기는 귀뚜라미에게 자네는 뭐에 쓰려고 톱을 가져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귀뚜라미는 ‘긴긴 가을밤 독수공방에서 임 기다리는 처자ㆍ낭군의 애(창자) 끊으려 가져가네.’라고 말한다.” 남도지방에서 처서와 관련해서 전해 오는 재미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처서 때의 세시풍속 가운데 가장 큰 일은 포쇄(曝)라고 해서 뭔가를 바람이나 햇볕에 말리는 것이지요. 나라에서는 사고(史庫)에 포쇄별관이란 벼슬아치를 보내서 눅눅해지기 쉬운 왕조실록을 말리도록 했습니다. 또한 선비들 역시 여름철 동안 눅눅해진 책을 말리고, 부녀자들은 옷장 속의 옷과 이불을 말립니다. 책의 경우 포쇄하는 방법은 우선 거풍(擧風) 곧 바람을 쐬고 아직 남은 땡볕으로 포쇄(曝)를 하지요. 경우에 따라서는 음건(陰乾) 곧 그늘에 말리기도 하는데 “건들 칠월 어정 팔월”이라는 말처럼 잠시 한가한 처서 때 농촌에서는 고추를 말리는 풍경이 수채화 처럼 곱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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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속풀이 277>

처용무(處容舞), 잡귀를 몰아내는 나례(儺禮)의식의 춤



지난주에는 중국 연변대학에 이어 <연길시 조선족예술단>을 방문하여 교류한 이야기를 하였다. 직업 악단과의 세미나를 통해서 레퍼터리의 확장방안, 관객의 확보방안, 그리고 음악의 내용, 춤과 악의 안배 등에 관한 의견을 나눈 후, 양쪽에서 2~3절목의 교류 공연이 이어졌다는 이야기, 예술단 측에서는 젊은 여가수의 경기민요 <풍년가>와 <잦은방아타령>의 발표가 있었고, 대금 <산조>가 연주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 쪽에서는 김병혜, 송효진, 김보배의 심청가 중 <범피중류>를 들려주었다는 이야기, 그 젊은 여가수의 선생이 연변 예술대학의 김순희 교수이고, 김순희교수의 스승이 바로 묵계월 명창이라는 이야기, 그래서 그 여가수의 창법이나 발음, 발림 등이 편안하고 낯설지 않았다는 이야기, 대금 산조의 경우는 북한의 저대에 키를 부착하여 개량하였으며 대금음악을 확산시키기 위해 소학교에서 400여 아동들에게 소금을 지도하고 있다는 이야기 등도 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서로가 진심어린 마음을 들어내며 뿌듯한 교류였으며, 이러한 결과는 오랫동안 교류를 이어온 그간의 만남이 원동력이 되었고, 이러한 교류회를 바탕으로 앞으로도 서로의 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는 이야기들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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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바꾸어 이번 주에는 이원기로도에 <포구락>과 함께 그려져 있는 <처용무(處容舞)>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한다. 처용무 그림이 포구락과 함께 들어 있다는 점으로도 상기 그림이 1600~1800년대의 잔치 모습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처용무는 궁중정재의 하나로 신라때 처용설화와 관계가 깊다. 고려 혜왕 때에는 처용희를 즐겼다는 기록도 있으며, 조선조 세종 25년 이후에는 여자 기생대신 남자를 쓰도록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또한 처용무는 성현의 《용재총화》에 따르면 한 사람이 검은 천으로 된 흑포사모(黑布紗帽)를 쓰고 추다가, 후에 오방(五方)의 처용, 즉 청(靑), 홍(紅), 황(黃), 흑(黑), 백(白)의 화려한 옷을 입은 춤꾼이 호방하게 추는 춤으로 정착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처용무에 있어서 오방을 상징하는 빛깔은 옷에 나타나 있고, 가면은 빛이 번쩍거리는 붉은 얼굴의 유광적면(油光赤面)이다.

처용무는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궁중 나례(儺禮)의식에 쓰였다. 이 의식은 새해를 맞이하면서 여러 종류의 잡귀를 몰아내는 궁중의식을 말한다. 그래서 12월 그믐날 밤에 악사와 기생, 악공들이 대궐로 들어가 음악을 연주하였다고 되어있다. 보통 의식 후에는 처용무를 2회 추게 되는데, 처음에는 다른 춤과의 함께가 아닌 홀로 추어지는 반면, 두 번째는 학무와 연화대의 합설로 처용무를 연출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이 있어서 후대에 전해지는 처용무는 두 번째 다른 춤과 함께 합설로 추어졌던 오락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잔치에 쓰기 시작한 것이 전해오는 것이다. 특히 잔치에서도 의식의 처음이나 중간에 추어졌던 춤이 아니라, 끝맺음을 하는 잔치를 끝냘 때 곧 파연에는 악무(樂舞)로 채택되어 쓰여 왔던 것이다.

조선전기에는 국왕이 군신을 위해 수시로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때의 음악이나 춤을 보면 초연(初宴)에는 태조 건국의 당위성을 노래하는 <수보록>이나 <몽금척>, <오양선>과 같은 악무가 들어있고, 중연(中宴)에는 <포구락>이나 <무고> 등이 연희되었으며 파연에는 태조의 문덕(文德)을 찬미하는 <문덕곡>을 쓰다가 세종이후에는 <정동방곡>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때까지는 아직 처용무가 잔치의 악무로는 채택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전기에는 태조의 문덕을 찬미한 문덕곡과 무공을 기린 정동방곡으로 초연, 파연을 해 왔는데, 연산군 이후 영조까지의 잔치에 사용된 악무는 조선 전기와 달리 파연에 있어 <처용무>가 등장하였다는 점이 달라진 셈이다.

예를 들어 1600년대 초엽, 인조 6년의 잔치를 보면, 제1작, 즉 첫잔을 올리는 의식에서는 <헌선도(獻仙桃)>로 시작하여, 제2작에는 <수명명(受明命)>, 제3작은 <연화대(蓮花臺)> 제4작 <포구락>, 제5작 금척(金尺), 제6작 무고(舞鼓), 그리고 파연(罷宴)인 제7작에 <처용무>가 등장하였다. 또한 순조 때의 《진찬》이나 《진작의괘》 등에 나온 그림을 보면, 5방의 원무 외에 4명의 협무(協舞)도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의 그림 자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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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처용무는 1800년대 초엽, 순조 무자년(1828)이후에서부터 고종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 유지되기는 하였으나 그 이후로는 파연무로 상연되던 <처용무>의 등장이 차츰 줄어들고 대신 새로 창작된 <춘앵전>이나 <선유락>, <무고>, <검무> 등이 많아진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원기로도에 <포구락>과 <처용무>가 함께 들어 있다는 점은 곧 이 그림에서 1600~1800년대의 잔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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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한 범 / 단국대 명예교수, 한국전통음악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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