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아치 16

(얼레빗 제5039호) 세종, 백성이 싫어하면, 밀어붙이지 않았다

"백성들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 그러나 농작물의 잘되고 못된 것을 답사하여 조사할 때 각기 제 주장을 고집하여 공정성을 잃은 것이 자못 많았고, 또 간사한 아전들이 잔꾀를 써서 부유한 자를 편리하게 하고 빈한한 자를 괴롭히고 있어, 내 심히 우려하고 있노라.“ 이는 《세종실록》 49권, 12년(1430년) 7월 5일의 기록입니다. 세종은 당시 벼슬아치들이 공정성을 잃어 양반과 부자만 좋게 하고 가난한 백성을 괴롭히고 있음을 꿰뚫고 있었으며,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백성이 싫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지도자의 생각이 만능이 아님을 잘 알고 임금이라도 맘대로 정책을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세종은 안건이 올라오면 마지막에는 자기가 결정하더라도 신하들..

(얼레빗 제4964호) 세종, 공법 시행에 앞서 국민투표 하다

《세종실록》 47권, 세종 12년(1430) 3월 5일에 보면 "정부ㆍ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직 벼슬아치들과 각도의 벼슬아치들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세종임금이 토지에 관한 세금제도 곧 공법(貢法)을 시행하기 전 백성들에게 의견을 묻는 지금으로 말하면 국민투표를 1430년 3월 5일부터 무려 5달 동안 시행한 것입니다. 이에 호조가 공법 시행에 관한 투표의 결과를 보고했는데 17만 여명의 백성이 참여해 9만 8천여 명이 찬성하고, 7만 4천여 명이 반대했으며, 전라도와 경상도는 찬성이 많았고, 평안도나 함경도는 반대가 많았습니다. 그때 인구를 생각할 때 17만 명의 투표 참여는 노비나 여성을 빼고 거의 모든 백성이 참여했을 것이..

(얼레빗 제4949호) 조선시대, 장애인도 정승 반열에 올라

조선시대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과 복지정책은 오늘날보다 훨씬 선진적이었는데 장애가 있어도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벼슬을 할 수가 있었지요. 예를 들면 조선이 세워진 뒤 예법과 음악을 정비하고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공을 세운 허조(許稠, 1369~1439)는 어려서부터 몸집이 작고 어깨와 등이 구부러진 꼽추였습니다. 하지만 허조는 태종이 선위할 때 '이 사람은 내 주춧돌이다.'라며 적극적으로 추천했고 결국 세종은 그를 좌의정에 올렸지요. 허조는 자기관리가 매우 철저했음은 물론 뇌물, 축재, 여색 등 부정부패와는 정말 완전히 담을 쌓은 벼슬아치였습니다. 자타공인 청백리인 맹사성조차 흑역사가 있었을 정도였지만, 허조는 정말 탈탈 털어도 먼지 한 톨 안 나오던 인물이었다. 이런 철저한 청백리 기..

(얼레빗 제4941호) 세종, 백성이 싫다는 정책은 밀어붙이지 않아

“백성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 그러나 농작물의 잘되고 못된 것을 가서 자세히 관찰하고 조사할 때 각기 제 주장대로 고집하여 공정성을 잃은 것이 자못 많았고, 또 간사한 아전들이 잔꾀를 써서 부유한 자를 좋게 하고 빈한한 자를 괴롭히고 있어, 내 심히 우려하고 있노라.” ▲ 서울 여의도공원에 있는 세종 동상, 세종이 동상 앞 시민을 굽어보는 듯하다. 위는 《세종실록》 12년 7월 5일 치 기록입니다. 세종임금은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백성이 싫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지도자의 생각이 만능이 아닐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으며, 임금이라도 맘대로 정책을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벼슬아치들이 공정성을 잃어 양반과 부자만 좋게 하고 가난한 백성을 괴롭히고 있..

(얼레빗 제4766호) 발신자ㆍ수신자 모르는 조선시대 청탁 편지

전경목이 쓰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가 펴낸 《옛 편지로 읽은 조선사람의 감정》에는 발신자와 수신자를 알 수 없는 편지 한 장이 있습니다. 원래 편지란 발신자와 수신자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글이지만, 이 편지의 끝에 보면 ‘누제(纍弟)가 이름을 쓰지 않은 체 머리를 조아려 아룁니다.’라고 썼습니다. ‘누제(纍弟)’는 귀양살이하는 사람이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로 죄인이기에 자신의 성이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입니다. ▲ 한 유배자가 지인에게 보낸 간찰, 갑자년 12월 1일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제공) 또 편지의 내용을 보면 귀양살이하는 사람이 지인에게 관찰사의 농락으로 유배지를 급하게 옮기게 되었다며, 하룻길을 갈 노비와 말을 빌려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죄수가 교도소에 있을 때나 이감하는..

(얼레빗 제4762호) 영조, 백성의 아픔에 하얀 쌀밥 못 먹겠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비록 금성 탕지(金城湯地, 방비가 견고한 성)가 있다고 해도 만약 백성이 없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하물며 북도(北道, 황해도ㆍ평안도ㆍ함경도)는 곧 옛날 임금의 고향이다. 여러 대의 임금이 돌봐준 것이 여느 곳보다 천만 배나 더하였는데, 내가 즉위하고부터 덕이 부족해 하늘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지 못하고 성의가 얕아 백성들을 감복시키지 못하는지라, 수해와 가뭄으로 굶어 죽는 참사가 없는 해가 없었다. (가운데 줄임) 이는 모두 내가 민생을 상처를 입은 사람처럼 보지 못하고 때맞추어 민생들을 구제하지 못한 소치니, 하얀 쌀밥이 어찌 편하랴?“ ▲ , 명주, 61.8c×110.5cm, 국립고궁박물관 이는 《영조실록》 영조 6년(1730년) 3월 26일..

(얼레빗 4758호) 임금과 왕비가 보낸 한글 편지

우리는 최만리를 비롯한 대다수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을 창제했어도 왕실이나 사대부들이 훈민정음이 언문이라며 외면한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해지는 문헌을 보면 임금부터 왕실 어른들은 한글로 편지를 썼음을 알 수 있지요. 또 이렇게 왕실이 한글편지를 썼다면 사대부 벼슬아치들도 적극적으로 쓰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를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 정조임금이 원손 시절 외숙모에게 쓴 한글편지(개인소장) 특히 정조임금은 어렸을 때부터 한글을 썼던 임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정조가 만 3~4살부터 46살 때인 정조 22년(1798년)까지 큰외숙모인 여흥민씨(驪興閔氏)에게 보낸 한글편지 16점을 모아 묵은 편지첩 《정조국문어필첩(正祖國文御筆帖)..

얼음 먹는 벼슬아치, 얼음 뜨던 백성 몰라 – 김창협, 「착빙행」

얼음 먹는 벼슬아치, 얼음 뜨던 백성 몰라 – 김창협, 「착빙행」 고대광실 오뉴월 푹푹 찌는 여름날에 高堂六月盛炎蒸 여인의 섬섬옥수 맑은 얼음 내어오네 美人素手傳淸氷 칼로 그 얼음 깨 자리에 두루 돌리니 鸞刀擊碎四座徧 멀건 대낮에 하얀 안개가 피어나네 空裏白日流素霰 왁자지껄 떠드는 이들 더위를 모르니 滿堂歡樂不知暑 얼음 뜨는 그 고생을 그 누가 알아주리 誰言鑿氷此勞苦 그대는 못 보았나? 君不見 길가에 더위 먹고 죽어 뒹구는 백성들이 道傍暍死民 지난겨울 강 위에서 얼음 뜨던 자들이란 걸 多是江中鑿氷人 조선 후기 문신 김창협(金昌協)의 「착빙행(鑿氷行, 얼음 뜨러 가는 길)」입니다. 냉장고가 없던 조선시대에는 얼음으로 음식이 상하는 것을 막았지요. 한겨울 장빙군(藏氷軍)이 한강에서 얼음을 떠 동빙고와 서빙고..

판서를 부끄럽게 한 아전 김수팽

판서를 부끄럽게 한 아전 김수팽 조선시대 선비들은 청렴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특히 비가 새는 방안에서 일산(日傘)을 받친 채 “일산이 없는 집에서는 장마철을 어떻게 견디어 내나?”라고 했다는 유관(柳寬)은 조선조 청백리로 소문났지요. 이수광의 『조선의 방외지사』에 보면 청백리 벼슬아치 김수팽(金壽彭)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선 영조 때 호조 아전을 지낸 김수팽은 청렴하고 강직해 ‘전설의 아전(衙前)’이라 불렸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습니다. 호조 창고에 나라 보물로 저장한 ‘금바둑알 은바둑알’ 수백만 개가 있었는데 판서가 한 개를 옷소매 속에 집어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김수팽이 “무엇에 쓰시려고 하십니까?”라고 묻자 판서는 “어린 손자에게 주려고 한다”라고 대답했지요. 이에 김수팽은 금바둑알 한 움큼을..

김홍도를 최고의 화가로 키운 강세황

김홍도를 최고의 화가로 키운 강세황 저 사람은 누구인고? 수염과 눈썹이 새하얀데 머리에는 사모(벼슬아치들이 관복을 입을 때 쓰는 모자)를 쓰고 몸에는 평복을 입었으니 마음은 산림에 가 있으되 이름은 조정의 벼슬아치가 되어 있구나. 가슴 속에는 수천 권의 책을 읽은 학문이 있고, 또 소매 속의 손을 꺼내어 붓을 잡고 휘두르면 중국의 오악을 뒤흔들만한 실력이 있건마는 사람들이 어찌 알리오. 나 혼자 재미있어 그려봤다!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화가로 문단과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년)이 자화상을 그리고 쓴 화제(畫題)입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 60년을 벼슬 한 자리 하지 못했어도 스스로 대단한 학식과 포부가 있다고 생각하며 절치부심 자신을 닦았습니다. 그가 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