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도 연변(沿邊) 각 고을 구자(口子, 소규모 초소)의 적변을 정탐하는 사람은, 한 군데마다 열 명을 정원으로 하여, 평상시에는 2교대로 나누어 근무하고, 변고가 생기면 번을 합해서 운영합니다. (가운데, 줄임) 그 근무자 가운데 정탐꾼이 4백 9명인데...“ 이는 《세종실록》 28년(1446년) 1월 4일의 기록으로 여기서 말하는 정탐꾼 곧 체탐인(體探人)은 요즘 말로 하면 첩보원으로 조선 초 세종대왕 때 주로 활약했습니다. 그 까닭은 조선 건국 초기 북방 영토를 확정 짓는 과정에서 고려 이래 현지의 토착세력이었던 여진족이 수시로 변경을 넘어와 약탈과 납치를 일삼았고, 이에 조선은 곳곳에 성과 목책을 쌓고 방어에 치중하는 것은 물론 수시로 체탐인(體探人)을 파견하여 여진족의 거주지나 세력에 대한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