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문화연대 415

멋쟁이를 만드는 멋장이

요즘엔 화장품 가게들에 밀려나 거의 자취를 감추었지만, 옛날에는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화장품을 파는 여인네들이 많았다. 그녀들은 화장품만 파는 게 아니라, 집밖으로 나가기 힘든 마을 아낙들의 얼굴을 가꾸어 주는 ‘출장 분장사’ 노릇까지 떠맡았었다. 바로 이들을 대신하여 생겨난 직업이 오늘날의 이다. 얼굴 못지않게 여자의 겉모습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머리 모양새이다. 마을 아낙들의 머리를 손질해 주고 온갖 수다까지도 다 받아 주던 직업이 미용사였다. 그런데, 미용실이 차츰 내부 장식이 화려해지며 ‘헤어 살롱’으로 바뀌더니, 미용사는 이제 로 불린다. 옷이 날개라는 말처럼, 옷은 입기에 따라 사람의 겉모습을 초라하게도, 근사하게도 만든다. 하지만 옷맵시를 낸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남의 ..

아침 인사말 풍경

출근 시간이 10분이나 지나서야 김대리가 생글거리며 들어온다. “좋은 하루 되세요.” 화를 참고 있던 부장에겐 생글거리는 미소도 얄밉고 인사말도 거슬린다. “좋은 하루가 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렇다. 이 표현은 우리 사회에 이미 널리 퍼져서 굳어져 있는 인사말이긴 하지만, 우리 말법에 맞지 않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곧 ‘되세요’라는 부분이 문제인데, ‘되다’라는 낱말은 본디 “부장님이 너그러운 사람이 되다.” 따위로 쓰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예이다. 여기서 ‘부장님’과 ‘너그러운 사람’은 결국 같은 격이다. 그런데 부장에게 좋은 하루가 되라는 것은 사람을 ‘좋은 하루’와 같은 격으로 본다는 것이니 크게 잘못이다. 이 인사말은 “좋은 하루 보내세요.” 또는 “오늘 하루도 즐겁게 보내세요.”로 고..

실랑이와 승강이

운전하다 보면, 길거리에 차를 세워놓고 말다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그런 상황을 두고, “운전자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과연 이 말이 알맞게 쓰이고 있는 걸까? ‘실랑이’란 본디 남을 못살게 굴어 시달리게 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옛날 시골 혼례식을 치르는 잔칫집에서는 식이 끝나면 으레 동네 아주머니들이 신랑 신부를 붙들고 ‘한번 안아 보라’느니 ‘입을 맞춰 보라’느니 하며 짓궂게 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을 일러서 “실랑이질 좀 시켜 보았다”고 했다. 또, 혼인날을 앞둔 신랑 친구들은 신부집에 가서 “함을 팔러 왔다”고 하면서 떼를 쓰는 풍습이 있다. 적당하다 싶은 때가 되었는데도 들어가지 않고 계속 소란을 피우면, 이를 보다 못한 이웃집 할머니..

오금을 못 펴는 사람들

무슨 일에 몹시 두려워서 꼼짝 못할 때 “오금을 못 편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에 관련되어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요즘 오금을 못 펴고 지낼 것 같다. 마땅히 오금을 펴지 않고 지내다가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오금은 무릎 뒷부분을 따로 일컫는 말이다. 곧 무릎을 구부릴 때 그 안쪽을 ‘오금’이라고 한다. 그래서 오금을 못 편다고 하면, 무릎을 구부렸다가 다시 펴지 못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돈벌이에 눈이 멀어 사람의 목숨조차 가벼이 해 온 어른들 모두 종아리를 맞아야 한다. 흔히 “종아리 때린다.”고 할 때에, 우리는 그 종아리가 무릎 아래 다리 뒤쪽을 가리킨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종아리는 무릎 아래 다리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고, 종아리 뒤쪽의 살이 볼록한 부분은 따로 ‘장딴지’라 한다..

갈아탈까? 바꿔 탈까?

여행하다 보면 버스나 열차를 환승하게 되는데, 이를 우리말로 “갈아타다” 또는 “바꿔 타다”로 뒤섞어 쓰고 있다. 서울역에서 열차를 타고 안동에 가려면, 경부선 열차로 영천까지 가서 다른 열차로 옮겨 타야 한다. 이때에 “영천에서 열차를 바꿔 탔다.”와 “영천에서 열차를 갈아탔다.”라는 표현이 혼동돼서 쓰이고 있다. 이 경우에는 ‘바꿔 탔다’보다는 ‘갈아탔다’가 더욱 알맞은 표현이다. ‘환승’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갈아타다’이다. 다시 말하면, ‘갈아타다’는 자기 의도대로 탄 것인 데 비하여, ‘바꿔 타다’에는 자기 의도와는 달리 ‘잘못 타다’는 뜻이 보태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바꿔 탄다는 말에서 ‘갈아탄다’는 뜻이 다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잘못 탄다’는 뜻이 더 강하게 들어 있다. 가령..

억장이 무너진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은 흔히 “극심한 슬픔이나 절망 따위로 몹시 가슴이 아프고 괴롭다,”는 뜻의 관용구로 쓰인다. 그러다 보니, 이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의 뜻을 ‘가슴이 무너진다’ 정도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주로 자기 가슴을 쾅쾅 치면서 억장이 무너지고 천지가 캄캄하다고 표현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의 본디 뜻은 따로 있다. 오랫동안 공들여서 해 온 일이 아무 소용없이 돼 버려서 몹시 허무한 심정을 나타내는 우리말이 ‘억장이 무너진다’이다.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들은 극심한 허탈감에 빠질 경우에 “억장이 무너진 것 같다.”고 말해 왔다. 이것은 슬픔이나 절망과는 다르지만, 가슴 아프고 괴롭기는 마찬가지이다. ‘억장’은 ‘억장지성’이란 한자말의 준말로 억 장 높이의..

다이어트

오월의 신록이 아직 한창인데 한낮에는 벌써 초여름 무더위의 향기가 난다. 이 싱그러운 계절을 좀 더 누리고 난 뒤에 더위를 만났으면 싶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노출의 계절을 맞이하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더 군살을 빼고 싶다. 우리는 살을 빼는 모든 행위를 ‘다이어트’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다이어트(diet)는 ‘살찌지 않는 음식’이나 또는 ‘식이요법’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영어이다.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살 빼는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가령 “다이어트하기 위해 수영장에 다닌다.”라든지, “에어로빅은 다이어트에 좋다.”는 말은 잘못이다. 음식을 조절하여 살을 빼려는 이들은 “다이어트로 살을 빼겠다.”고 말할 수 있지만, 운동으로 살을 빼려는 이들은 다른 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안갚음하러 귀향합니다

“안갚음하러 귀향합니다.” 언뜻 들어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다. 빚을 갚지 않기 위해 귀향한다는 걸까? (그렇다면 문장이 잘못 되었다.) 고향의 누군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귀향한다는 걸까? (이때에는 낱말의 철자가 틀렸다.) ‘앙갚음’이란 말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남이 자기에게 끼친 만큼 자기도 그에게 해를 입힌다.”는 뜻의 말이다. 한자말로 하면 ‘복수’이다. 가령 “그가 나를 불행에 빠뜨렸으니, 나도 앙갚음을 할 거야.”처럼 쓰이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말에 앙갚음과 발음이 무척 비슷한 ‘안갚음’이라는 낱말이 있다. 빚을 갚지 않는다는 ‘안 갚음’이 아니라, 어버이의 은혜를 갚는다는 참한 뜻을 가진 아름다운 우리말이다. 곧 “안갚음하러 귀향합니다.”는 부모님을 봉양하겠다는 갸륵한 마음으로 귀향한다는..

비설거지와 표심설거지

6월 4일은 지방선거를 치르는 날이다. 6월 들어 전국 곳곳에서 내리기 시작한 비가 이 날에도 드문드문 투표소로 가는 길을 적실 듯하다. 온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도려냈던 진도 앞바다의 참담한 사고가 아직 수습되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권력자들을 뽑아 주어야 하는 발걸음이다. 가느다란 빗줄기에도 자꾸 걸려서 발을 내딛기가 힘겹다. 비와 관련된 우리말 가운데 ‘비설거지’가 있다. 이 말은 “비가 오려고 할 때, 비에 맞으면 안 되는 물건을 치우거나 덮는 일”을 뜻한다. “비 올 것 같다. 빨래 걷어라.” 하는 것보다 “비 올 것 같다. 비설거지해라.”고 하면, 빨래뿐 아니라 비 맞으면 안 되는 다른 물건들도 치우라는 말이 된다. 지방선거를 통해 권력을 꿈꾸는 이들이 혹시 ‘표심설거지’를 할까 염려스럽다. ..

하룻강아지

흔히 사회적 경험이 적고 자신의 얕은 지식만을 가지고 덤벼드는 사람을 가리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한다. 이 속담에는 ‘하룻강아지’가 등장하는데, 언뜻 보면 태어난 지 하루밖에 안 된 강아지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속담이라도 그렇지, 갓 태어나서 눈도 못 뜨고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강아지가 범에게 덤빌 리는 만무하다. 이 ‘하룻강아지’의 ‘하룻’은 날짜를 헤아리는 그 ‘하루’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소나 말, 개 등과 같은 가축의 나이를 ‘하릅, 이듭, 사릅, 나릅, 다습, 여습’ 들처럼 세었다. 이때의 ‘하릅’은 한 살을 뜻하므로, 한 살 먹은 개를 ‘하릅강아지’라 하였고, 이 말이 오늘날 ‘하룻강아지’로 변하여 내려온 것이다. 그러므로 '하룻강아지'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