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세상사는 이야기 164

길거리가 어지럽다

간판은 왜 달까? 비싼 돈을 들여 다는 것인 만큼 다는 효과를 기대할 것이다. 서울 시내 거리에 나가면 수많은 간판이 달려있다. 우리말글 문제를 떠나서 저 간판은 제구실을 하고 있을까? 상표를 다루는 변리사로서 길거리에 있는 간판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길거리에 ‘CHANEL’이라 적힌 간판이 있다. 이걸 어떻게 소리 낼까? 영어로 공부한 사람은 ‘채널’이라 읽을 텐데, 실제는 ‘샤넬’이라 한다. 프랑스 말이기 때문이다. ‘RAISON’이란 이름을 단 담배가 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읽는지 궁금하다. 내가 담배를 피울 때 ‘레이슨’ 달라고 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레종이라 부른단다. 담뱃갑 어디에도 담배 이름이 그렇다고 표기하지 않아 더더욱 고약하다. 길거리에 나가보면 여기가 한글을 쓰는 대한민국 서..

웰빙과 힐링을 빼니 치유가 보인다

우리말도 그렇지만, 영어의 말뿌리(어원)를 알면 그 낱말의 뜻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영어 ‘culture’를 받아들이면서 한자권에서는 ‘문화(文化)’라고 번역했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하는 행동 양식 등을 문화라고 쓴 것이다. ‘농업’이라고 번역하는 ‘agriculture’의 말뿌리는 땅에서(agri)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하는 일(culture)에서 왔다. 예전에는 모여 사는 집단 사이에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이 동네에서 농사짓는 방식과 저 동네에서 농사짓는 방식이 서로 달랐다. 그렇게 서로 다른 농사짓는 방식이 바로 영어로 ‘agriculture’이다. ‘culture’를 받아들이면서 ‘문화’라는 멋없는 낱말 말고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인공지능과 AI

인공지능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면서 ‘에이아이(AI)’가 기술적, 상업적 유행어로 떠올라 널리 쓰인다. 온갖 광고에 에이아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에이아이(AI)는 Artificial Intelligence의 약자인데, 이게 '인공지능'이라는 말보다 있어 보이나 보다. 최근 들어 기술적인 각광을 받아서 그렇지 사실 인공지능의 역사는 짧지 않다. 컴퓨터의 역사가 곧 인공지능의 역사이다. 컴퓨터 자체가 생각하는(좁은 의미로 ‘계산하는’) 기계를 만들려는 목표 아래 발전했다. 수많은 공학자, 기술자들이 컴퓨터를 발명하고도 ‘스스로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기 위하여 큰 노력을 쏟아부었다. 컴퓨터가 훌륭한 발명품이긴 하지만 고급 계산기에 불과하므로 ‘생각한다’는 개념의 수준에 어울릴 만큼 매력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나 쓰고 아무도 모르는 거버넌스, 너 뭐니?

어쩌다 지방자치단체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돼 ‘늘공’(늘 공무원)들과 일한 지 몇 년째다. 그사이 확실히 알게 된 하나가 ‘공무원은 문서로 일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과업은 문서와 증빙으로 시작해 문서와 증빙으로 끝나는데, 첫 문서와 마지막 문서 사이에 ‘문제 될 것’만 없으면 과업은 성공으로 종결된다. 공무원들이 작성한 보고서, 방침서, 계획서 등 각종 문서를 읽다 보면 ‘다양한, 시너지, 효율화, 극대화, 제고, 향상, 체계적’이 없다면 이들은 어떻게 일을 할 수 있을까 싶게 저 단어들을 애용한다. 주로 주민에게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무를 하다 보니 저 단어들이 문장 안에서 ‘다양한 시너지를 발휘해 문장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단어뿐만이 아니다. 문서 틀도 대부분 같고, ..

포스트 코로나의 시대는 언제인가?

코로나19가 유행한 지 벌써 1년 반이 넘었다. 처음에는 한두 달 이러다 말겠지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감염병의 고통은 역사책이나 다큐멘터리에서나 접하는 이야기였는데, 어느덧 벗어날 수 없는 일상이 됐다. 백신이 나왔다지만 아직 접종률도 충분하지 않고, 변이에 대한 효과도 미심쩍다. 어서 코로나19가 없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데 바람만큼 쉽지 않을 것 같아 울적해지기도 한다. 코로나19(이후 코로나로 줄임) 유행이 길어지면서 ‘포스트 코로나’라는 신조어도 유행하고 있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접두사 ‘포스트(post)’는 무엇인가의 ‘후에’, ‘뒤에’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애프터(after)와 뜻이 같다. 그러니까 포스트 코로나는 ‘코로나 이후’라는 뜻이다. 인터넷 포털 다음백과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엔차감염, 이대로 둘 것인가?

지난해부터 코로나바이러스가 만연하여 일반인들도 감염병에 관한 관심이 대단히 높다. 질병관리본부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 중에 ‘엔(n)차감염’이라는 복합어가 있다. 엔차감염은 감염의 발생 단계를 설명하는 말의 하나이다. 즉 한 감염병이 특정 집단에서 어떤 사람에게 처음 발병했을 경우를 일차감염이라고 하고, 일차감염 환자에서 또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었을 경우를 이차감염이라고 하며, 삼차감염 이상의 발병 경로를 잘 모르는 후속 단계의 감염을 통틀어 엔차감염이라고 말한다. 수학이나 통계학에서 잘 모르는 수를 상징적으로 로마자 알파벳의 ‘n’을 사용하여 표기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엔차감염이라는 말에 대해 거부감이 있고 그동안 민원이 많이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네이버 검색 ..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라기보다는 ‘한반도 평화 정책’

정보통신 기술이 발달하면서 지구촌의 여러 나라가 시공간적 제약을 넘어 가까워지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다양한 언어가 섞이고, 융합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경쟁력 없는 언어는 소멸되거나 변형된다.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앞으로 100년 안에 전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7,000개가 넘는 언어 중 절반 이상이 소멸할 것이고, 200년 안에 200-300개 내외의 언어만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말은 어떠한가. 다행히 사용자 수를 기록해서 언어의 순위를 매기는 에스놀로그(Ethnologue)에 따르면 2019년 한국어는 7,730만 명, 15번째로 사용자 수가 많은 언어라고 한다. 터키어가 14위, 프랑스어가 16위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말은 적어도 몇백 년 안에는 소멸하지 않을..

문물과 언어 – ‘모빌리티’를 보면서

몇 해 전에 유학생 유치와 교류 확대의 목적으로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녔다. 중앙아시아는 소련이 해체된 후 독립한 5개의 국가로 구성된 지역으로, 과거에 투르키스탄이라고 부르던 곳이다. 투르크(돌궐) 사람의 땅이라는 뜻이다. 이들 국가의 언어는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것으로, 지역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서로 간의 일상적 소통은 문제가 없는 수준이다. 이 출장길에 우즈벡인 직원 한 명과 같이 다녔다. 우즈벡은 과거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지로 사마르칸트의 고구려 사신도로 우리에게 친숙한 곳이다. 오랜 기간 동안 동서 교역의 중심이었던 만큼 다양한 인종이 함께 산다. 중국에 50여 개의 소수민족이 있다고 하는데, 우즈벡은 인구 3천만 명에 150개가 넘는 민족이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언어도 다양해..

이제 포퓰리즘을 ‘대중주의’라고 말하자

요즘 정치권에서는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의미는 대체로 부정적인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상대방을 비판하거나 공격하기 위해 동원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퓰리즘이 엘리트나 소수 지배세력이 아닌 다수의 일반 사람들을 지향하는 용어임에도, 실제로 일반 사람들은 이 용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 뜻을 이해하기 쉬운 통일된 번역어가 있으면 좋을 텐데, 아직 그렇지 못하다. 물론 우리말로 번역해서 사용하는 경우들도 적지 않지만, 어떻게 바꾸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다양해지기에 차라리 그냥 영어식 표현을 사용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학자들은 번역어 선택 자체가 논쟁적이어서 논란을 피하려고 영어식 표현을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