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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통술은 크게 쌀 따위 곡식과 누룩 그리고 물을 원료로 하여 발효시키는 술인 발효주(醱酵酒, 곡주-穀酒)와 발효주를 증류하여 알코올도수가 높고 무색투명한 술인 소주(燒酒)로 나눕니다. 그런데 발효주는 순하고 부드러우며 맛과 향이 좋긴 하지만, 알코올 도수가 낮아 상온에서 쉽게 상합니다. 이에 견주어 소주는 도수가 높아 오래 두어도 잘 변하지 않고 빨리 취하고 깨끗하게 깨는 것이 장점입니다. 그런데 발효주에 소주를 붓고 다시 발효시켜 만든 술이 강하주로 발효주와 소주의 장점을 모은 술이지요.
이 강하주로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45호 보성 강하주(寶城 薑荷酒)가 있습니다. ‘보성 강하주’는 보성군 회천면 도화자 선생이 3대 째 맥을 이어온 전통주로 향과 맛이 진하고 숙취가 없으며, 마실 때 부드럽고 뒷맛이 개운하다는 평가입니다. 재료로 멥쌀, 찹쌀은 물론 밀, 보리 등 주곡(主穀)이 모두 들어가는 전국적으로도 유래가 드문 술이지요.
이 술은 맛이 뛰어나서 예로부터 임금님께 진상하던 술이며, 무더운 여름을 탈 없이 날 수 있는 술이라는 뜻의 과하주(過夏酒)라고도 불립니다. 보양의 효과가 뛰어나며, 대추의 단맛, 강활의 쓴맛, 용안육의 달짝지근한 맛이 어우러져 향이 좋은 술이지요. 이와 비슷한 술로는 수원 김명자 선생의 약소주(藥燒酒), 전남 영광 조희자 선생의 강하주(薑荷酒), 남원 김길임 선생의 신선주(神仙酒) 같은 것들도 있습니다. 다가오는 여름을 잘 나기위해 강하주 한잔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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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악속풀이 2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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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춘, 10년 만에 <소헌국악연구원>을 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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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속풀이에서는 백영춘에게 영향을 준 라디오 속의 명창들 중에는 장학선 외에 이반도화(李半島花), 이정렬, 이부용, 장금화 등도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평양의 기성권번 김밀화주의 제자들이란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므로 현재 남한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서도소리의 뿌리는 김밀화주의 소리이며 그 소리를 이어받은 장학선을 국가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 서도소리의 최초 예능보유자로 인정하였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이후는 김정연과 오복녀가 서도소리를 전승해 왔고, 이들의 제자들이 현재 그 소리를 이어가고 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백영춘에게 소리의 길을 가도록 영향을 준 장학선, 이정열, 이반도화, 이진홍, 이소향, 유개동과 같은 명창들은 1900년대 초 한일강제합병 앞뒤로 태어나서 어려운 시대를 소리와 함께 살다간 진정한 예능인들이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또 백영춘은 라디오를 들으며 소리를 익히던 중, 방송국이 주최하는 ‘민속의 잔치’에 출전하여 실력을 발휘하였고,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벽파 이창배 사범에게 부름을 받았다는 이야기, 그래서 소리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청구고전성악학원을 찾아 선생의 제자가 되었고 그 학원에서 시조며 가사와 함께 입창과 좌창 등을 배우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 그리고 꿈에 그리던 김옥심 명창(1925~1988)도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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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백영춘이 <청구고전성악학원>을 찾아 선생에게 공부한 이야기와 제자가 된 지 10여년 만에 무형문화재 이수자가 되었고, 또한 본인의 소리학원을 개설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한다.
백영춘이 선생의 학원을 찾아갔을 당시, 1960년대 후반에는 동 학원에 젊고 유능한 여성 소리꾼들이 많이 모여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현재 70대 중반을 넘고 있는 이은미, 최영란, 지화자 외에 여러 명 있었는데, 일부는 이미 활동을 접고 있거나 타계한 사람들도 있다.
남자 제자가 흔치 않던 당시의 민요계에 있어서 그리고 벽파 선생에게 있어서 백영춘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단기간에 민요 몇 가락을 배우려는 뜨내기 원생들은 많았으나, 장차 전문적인 소리꾼이 되어 대를 이어가겠다는 남자제자는 귀했기 때문이며 그럴만한 재목을 구했다는 이유가 컸던 것이다.
벽파의 수업 방식은 처음부터 대뜸 민요가락이나 좌창을 지도하는 여느 소리꾼들과는 달랐다. 항상 성악의 기초를 정가(正歌)라고 생각하는 사범이어서 학원생들이나 초보자들에게 시조나 가사, 때로는 가곡도 지도하면서 발성이나 호흡을 강조한 다음, 주 전공분야인 선소리 산타령이나 좌창 등을 지도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실기만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 배경을 튼튼하게 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민요란 무엇인가로 시작해서 성악의 특징, 민요의 역사, 종류, 사설의 이해, 고어(古語)풀이 등 이론적인 바탕을 철저하게 지도하는 것이다.
필자도 고등학교 시절 3년간 벽파선생에게 경서도소리를 공부한 경험을 지니고 있다. 소리도 소리이려니와 사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지역, 사건에 대해서는 막힘이 없는 것이다. 선생은 사설의 내용들을 학생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칠판에 한문으로 판서해 놓고 지도하였는데, 그 내용들이 재미있고 교훈적이었으며 또 판서 자체가 너무 멋있고 아름다워서 수업이 끝나도 지우질 못했었다. 지금 같으면 카메라나 휴대폰에 저장을 해 놓을 수도 있겠지만 당시로는 저장 방법이 없어 안타깝기만 했던 기억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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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벽파 선생의 민요수업은 단순히 목청만을 돋우는 실기수업 위주가 아니라, 이론에 기초한 학구적인 내용들을 동시에 지도하는 방법이어서 단기간에 민요나 몇 가락 배우러 오는 일반인이나 수강생 중에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시조와 가사, 가곡과 같은 정가를 먼저 가르치고 난 다음 긴잡가나 산타령, 그리고 민요 등을 지도하는 방식은 민요창을 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중요한 교습방법임을 백영춘은 잘 배웠다. 그 역시 선생의 방법을 배워 제자들에게 폭 넓은 소리의 세계를 안내해 주고 있는 것이다.
벽파에게 입문한 백영춘은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의 전수생이 되었다. 당시 전수생은 모두 6명이었는데, 백영춘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은 여성 창자들이었다. 그래서 당국의 요청으로 곧 남자 전수생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백영춘은 벽파선생에게 장고 장단도 열심히 배웠다. 선생은 한국음악, 특히 선소리나, 민요, 좌창 등의 모든 소리는 흐름, 곧 장고의 장단이 중요하다는 점을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의 제자들에겐 장고의 반주, 스스로 창을 하면서 장단을 칠 줄 아는 능력을 부여해 주었던 것이다.
백영춘은 스승의 뜻을 받들어 소리공부며 장단 등 모든 과정을 1974년에 마치면서 영등포에 <무궁화민속가무단>을 창단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민요의 강습과 서울과 지방을 다니며 각종 공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벽파 선생이 경서도소리의 전승보급을 위해 기획해 온 ‘선소리사타령 및 12잡가 발표회’에는 열심히 참여해 왔다. 이 공연은 74년부터 84년까지 해마다 국립극장에서 정기적으로 해 왔는데 산타령은 기본이고, 12잡가와 휘몰이잡가, 민요 등 경서도 소리의 모든 분야를 망라해 발표하는 무대였다.
백영춘은 1975년, 국악협회가 주최한 <전국민요경창대회>에서 당당하게 최고상인 장원을 차지하였고, 다음해에는 무형문화재 <선소리산타령>의 이수자가 되었다. 이수자는 전문가의 길에 들어선 사람임을 공공연하게 인정받는 사람이다. 선생의 허락 아래 그의 아호를 딴 <소헌국악연구원>을 꼭 10년 만에 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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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한 범 / 단국대 명예교수, 한국전통음악학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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