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117

(얼레빗 4472호) 신라 사람들 고래고기, 복어, 성게도 먹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9월 7일 경주 대릉원 일원에 있는 신라 왕족의 무덤 가운데 하나인 사적 제512호 ‘경주 서봉총’ 재발굴한 성과보고서를 펴냈다고 밝혔습니다. 이 서봉총은 서기 500년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서에서 특별히 눈에 띈 것은 무덤 둘레돌[護石]에 큰항아리를 이용해 무덤 주인공에게 음식을 바친 제사 흔적이 고스란히 발견된 것입니다. 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같은 역사기록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 경주 서봉총 남분 큰항아리 내부 동물 유체발견 모습 무엇보다 서봉총 남분의 둘레돌에서 조사된 큰항아리 안에서 동물 유체 곧 뼈, 이빨, 뿔, 조가비 등이 많이 나와 당시 제사 음식의 종류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재발굴의 독보적인 성과지..

(얼레빗 4468호) 유리병과 잔, 신라와 서역 교류의 증거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국보 제193호 이 있습니다.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병 1점과 잔 3점의 유리제품이지요. 병은 높이 25㎝, 배지름 9.5㎝이고, 잔① 높이 12.5㎝, 아가리 지름 10㎝ 잔② 높이 8㎝, 아가리 지름 10.5㎝ 잔③ 높이 10.5㎝, 아가리 지름 9.5㎝의 크기입니다. ▲ 국보 제193호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과 잔, 국립중앙박물관 병은 연녹색을 띤 얇은 유리제품으로 김둥근꼴의의 달걀 모양으로 물을 따르기 편하도록 끝을 새 주둥이 모양으로 좁게 오므렸습니다. 가느다란 목과 얇고 넓게 퍼진 나팔형 받침은 페르시아 계통의 그릇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목에는 10개의 가는 파란빛 줄이 있고, 아가리에는 약간 굵은 ..

(얼레빗 4452호)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선 백의관음보살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에는 극락보전 후불 벽화인 보물 제1313호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가 있습니다. 이 벽화는 극락보전의 후불벽 뒷면 토벽에 황토색을 칠한 뒤 유려하고 간결한 맛으로 그린 관음보살벽화로, 1476년에 후불벽의 아미타삼존벽화와 함께 조성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떠가는 듯 일렁이는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백의관음보살이 그려진 벽화입니다. ▲ 무위사 극락전 백의관음도(모사도), 모사도 소재지 국립중앙박물관 하얀 옷을 입고 있는 백의관음보살은 당당한 체구에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오른쪽으로 몸을 약간 돌린 채 두 손을 앞에 모아 서로 교차하여 오른손으로는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정병을 들고 서 있습니다. 바람에 심하게 흩날리는 듯한 옷자락과 넘실대는 듯한 파..

(얼레빗 4445호) 대한제국 탄생, 황제 금색 오조룡보 입다

“천지에 고하는 제사를 지냈다. 왕태자가 함께하였다. 예를 끝내자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고유제(告由祭)를 지냈으니 황제의 자리에 오르소서.’ 하였다. 신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단(壇)에 올라 금으로 장식한 의자에 앉았다. 심순택이 나아가 12장문의 곤룡포를 성상께 입혀드리고 씌워 드렸다. 이어 옥새를 올리니 상이 두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왕후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 채용신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금빛 곤룡포를 입은 고종황제 어진, 180×104cm, 국립중앙박물관 위는 《고종실록》 고종 34년(1897년) 10월 12일 기록으로 123년 전 오늘 고종 임금은 나라 이..

(얼레빗 ) 조선시대의 변호사, 외지부를 아십니까?

우리 주변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라는 말을 듣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인이 아무리 착해도 다른 착하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법은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법이란 건 여간 어렵지 않아서 일반인은 다가서기 쉽지 않지요. 그래서 현대사회에선 변호사가 일반인을 대신해서 법에 관한 업무를 맡아주고 있습니다. 다만, ‘전관예우’라던지 하는 것을 앞세워 정의롭지 못하게 소송이 끝나는 수도 종종 일어납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엔 어땠을까요? 법 정보가 모두 한자로만 되어있던 조선시대 역시 공부를 한 사람을 뺀 일반 백성은 다른 사람이 대신 법 관련 일을 해줄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일을 했던 사람들을 ‘외지부(外知部)’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정식 관원이었던 도관지부와 달리 외지부는 관원이 아니면서도 소송인..

(얼레빗 ) 오늘은 ‘포도지정’을 기억하는 백로(白露)

금년 더위는 넘치고 가혹했는데 미친듯한 장마가 더 때려서 고생했네 세월이 어찌 바뀌지 않는가 했더니 속이지 않고 백로가 찾아 왔구나. 이우현 시인의 소박한 시 “백로날에 한편”이라는 시입니다. 정말 세월이 어찌 바뀌지 않는가 했더니 정말 속이지 않고 백로가 찾아 왔습니다. 오늘은 24절기 열다섯째로 흰 이슬이 내린다고 하는 백로(白露)입니다. 옛사람들은 이때만 되면 편지 앞머리에 “포도순절(葡萄旬節)에 기체후 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 하옵시고”라는 인사를 꼭 넣었습니다. 그것은 백로부터 추분까지의 절기는 포도가 제철일 때여서 그런 것이지요. 포도는 예부터 다산(多産)의 상징으로 생각해서 맨 처음 따는 포도는 사당에 고사를 지낸 다음 그집 맏며느리가 통째로 먹었습니다. 그러나 처녀가 포도를 먹으면 망측하다..

(얼레빗 4420호) 무가지보 세한도, 국민 품에 안기다

금전으로는 그 값어치를 평가할 수 없다는 무가지보, 국보 제180호 가 지난 8월 21일 국립중앙박물관 품에 안겼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세한도’는 조선 후기 올곧은 선비 정신이 오롯이 담겨있는 문인화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요. 제주도에서 유배 중이던 스승 추사를 위해 그의 제자였던 역관 이상적은 새롭게 들어온 중국의 문물 자료를 모아 스승에게 보내주는데, 이를 고맙게 여긴 추사가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려 선물한 것이 바로 ‘세한도’입니다. ▲ 추사 김정희의 국보 제180호 그런데 이 세한도는 해방 직전인 1944년 일본인 수집가 후지스카 지카시(藤塚隣)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를 안 서예가 손재형은 연일 공습으로 아수라장이 된 도쿄의 후지즈카 집에 100일 동안 날마다 찾아가 문안인사를 하며, ..

(얼레빗 4411호) 비례와 조화미가 뛰어난 <청자 참외모양 병>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국보 제114호 이 있습니다. 이 병은 청자의 전성기에 만들어진 참외모양의 꽃병으로, 높이 25.6㎝, 아가리지름 9.1㎝, 밑지름 9.4㎝의 크기입니다. 긴 목 위의 아가리가 나팔처럼 벌어진 것이 참외꽃 모양이고, 목의 가운데에는 2줄의 가로줄이 백토(白土)로 상감되어 있습니다. ▲ 국보 제114호 , 국립중앙박물관 몸통은 참외 모양으로 여덟 부분으로 나뉘어 골이 지어있습니다. 목의 바로 아래에는 8개의 꽃봉오리 띠가 백상감되어 있고, 몸통의 가운데에는 여덟 개의 면에 모란무늬와 국화무늬를 번갈아 가며 1개씩 장식하였으며 몸통의 아랫쪽은 연꽃이 흑백상감 되어 있습니다. 아래부분에는 주름치마 모양의 굽이 붙어있지요. 유약은 그다지 고르지 않고 빛깔도 조금 어두운 편이지만,..

(얼레빗 4406호) 소치 허련의 ‘설경산수도’를 감상한다

이틀 전은 더위가 한고비로 치닫는다는 ‘말복’이었습니다. 장마가 지나고 이제 불볕더위가 한창인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9~1892)의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를 감상해보겠습니다. 그림 앞쪽 시내가 바라다보이는 곳에는 조그마한 초가 하나가 있고 초가집 창문에는 맨 상투를 튼 한 선비가 외로이 앉아 있는 옆모습이 보입니다. 초가 뒤쪽으로는 이파리가 다 떨어진 겨울나무가 솟아 있고, 그 뒤로 그려진 산들은 눈이 쌓여 하얗게 등성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 허련(許鍊, 1809~1892)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 19세기, 종이에 채색, 53 × 27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위쪽에는 “산과 시내가 조용하여 찾아오는 이 없으니, 임포의 집이 어디인지 물어나 볼까〔溪山寂寂無人到 試..

(얼레빗 4405호) 우리 겨레의 무예 ‘활쏘기’ 무형문화재되다

“큰집을 지어 대사례 때 쓰는 활ㆍ화살과 여러 가지 기구를 간직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그 각의 이름을 ‘육일각(六一閣)’이라 했으니, 대개 활쏘기는 육예(六禮)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영조실록》 영조 19년(1743년) 윤4월 7일의 기록으로 ‘활쏘기’는 유교경전 《주례(周禮)》에서 이르는 여섯 가지 기예(예법, 음악, 활쏘기, 말타기, 붓글씨, 수학) 가운데 하나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성균관(成均館)에서 공자를 모신 문묘(文廟)에 제사를 지낸 뒤 명륜당(明倫堂, 유학을 가르치던 강당)에서 과거시험을 본 후 임금과 신하가 함께 활쏘기 곧 ‘대사례(大射禮)’를 행했지요. ‘활쏘기’는 우리 겨레가 고대로부터 주요한 무술의 하나로 생각해왔음은 물론 사대부가를 중심으로 기품 있는..